[문학예술]당신 마음의 침대는 비어있나요?

  • 입력 2008년 11월 8일 03시 01분


◇ 그 여자의 침대/박현욱 지음/256쪽·1만 원·문학동네

타인의 부재를 확인하기 싫어 혼자 눕기에 알맞은 크기의 침대만 고집하는 여자, 사랑하지 않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우리는 왜 같이 사는가’라는 질문을 암묵적 금기로 설정해 둔 부부, 박사학위를 딴 뒤 계속해서 임용에 실패하고 아내마저 떠나버린 중년의 대학 강사…. 여기 우리가 사는 우습고 쓸쓸한 세상이 있다.

최근 개봉한 동명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의 원작자인 박현욱 씨가 첫 소설집 ‘그 여자의 침대’(문학동네)를 펴냈다. 그동안 장편소설 ‘동정 없는 세상’ ‘새는’ 등을 출간했지만 단편을 엮어 낸 것은 등단 8년 만에 처음이다.

이 단편집에서 그는 동시대 도시인들의 삶과 세태를 냉소적인 입담으로 가감 없이 짚어낸다. 표제작 ‘그 여자의 침대’는 이혼한 뒤 타인이 자신의 삶에서 빈자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여자 이야기다. 여자는 애인의 조언에 따라 낡고 좁은 침대를 더블베드로 바꾸지만 큰 침대 위에 누울 때마다 불안해서 잠들 수 없다. 자기 영역에 타인이 관여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결벽증, 상처가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는 방어적 인간관계가 침대의 빈 공간을 통해 부각된다.

관계의 불안정은 삶 곳곳에 흠집을 내지만 이들은 파국을 체념해 버릴 만큼 무기력하다. ‘생명의 전화’에서 무의미한 부부 관계와 무료한 삶에 지친 남자는 오래전 전화 한 통에 생명을 걸 만큼 절박했던 연인을 떠올리고 전화상담 자원봉사를 이수해 보려 하지만 교육비가 27만 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미련 없이 컴퓨터를 끈다. ‘그 사이’에서 재혼한 부인의 가출로 또 한 번의 파경을 맞이한 남편은 그 절망을 ‘담배를 피우는 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는 순간’으로 담담히 표현한다.

때로 저자는 앞지르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경쟁사회의 폐부를 응시한다. ‘이무기’는 입단을 앞둔 결전의 대국을 치르는 청년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간 그는 기재가 넘치는 바둑 신동들 사이에서 힘겹게 생존하지만 번번이 프로 기사가 되기 위한 입단에서 좌절한다. 나이 제한 때문에 일생의 마지막 입단 기로에 선 그가 이번 승천에 실패한다면 평생을 ‘이무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혼한 중년의 대학 강사 이야기를 다룬 ‘연체’도 마찬가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10년이 지나도록 임용되지 못하고 앞날 역시 기약할 수 없는 그에게 연체되는 것이 비단 구립도서관 대출 도서뿐은 아닐 것이다. 경쟁에서 연체된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아도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므로.

이 책은 우리가 처한 각각의 위기 상황을 가감 없이 끌어내 오지만 묵직하거나 처연하지 않다. 세태를 짚어내는 작가의 위트와 입담이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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