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과학과 이성

  • 입력 2008년 6월 21일 03시 01분


임지순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한국인 중에서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과학자라는 평을 듣는다. 탄소 나노튜브 반도체와 수소에너지 저장기술 연구는 세계 과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임 교수는 학창 시절부터 여느 수재들이 쫓아가기 어려운 기록을 세웠다. 1970년 경기고 3학년 때 예비고사 전국 최고득점을 기록했고 서울대 입시 전체수석을 차지했다. 1980년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벨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2006년에는 ‘국가석학’으로 선정됐다.

동아일보와 IT전략연구원(원장 이각범)이 공동 개설한 ‘퓨처코드CEO포럼’에서 임 교수는 촛불시위와 관련한 가족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대학생 자녀들이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오전 3시경 귀가한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KAIST 대학원에 다니는 딸은 촛불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일부러 대전에서 올라왔다. 임 교수는 한국산 닭고기와 미국산 쇠고기를 먹더라도 건강상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아내와 자녀를 안심시킬 수 없어 과학자로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그는 “미국산 쇠고기에 관한 논의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데 놀랐다”며 “과학자로서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국산 쇠고기 사태에는 정치와 반미감정이 뒤섞여 과학만 분리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은 식품의 안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굴욕협상 같은 면만 부각되고 식품의 안전성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소홀합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걱정스럽습니다.”

자녀 설득 못한 과학자의 탄식

임 교수는 수의학(獸醫學) 전공은 아니지만 과학연구자의 시각에서 미국산 쇠고기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이만하면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수학에서는 하나만 예외가 존재해도 공식으로 성립되지 않지만 과학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식품의 안전도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은 음식도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칼럼이 나가면 임 교수가 ‘촛불시위 세력’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어 필자가 전화로 의견을 다시 물었는데도 그는 주저 없이 소신을 말했다.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젊은 과학자들이 황우석 박사 논문의 사진 조작을 밝혀냈듯이 지금은 전문가들이 용기 있게 발언할 때라고 생각한다. 과학이나 가축의 질병, 그리고 인간의 건강에 관한 진실은 다수결이나 여론조사 또는 시위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가 촛불시위의 위세에 밀려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기로 했다. 미국에서 광우병위험물질(SRM)을 제거한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보통 햄버거에 들어간다. 촛불시위가 미국인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햄버거 쇠고기’를 막는 데 성공한 것이라면 촛불을 켜들었던 사람들도 허망할 것이다. 요즘 촛불에서는 쇠고기가 떨어져나가고 정치운동만 남은 것 같기는 하지만….

필자는 사회학을 전공하는 A 교수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가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전달 위험성을 사실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녀를 촛불시위 현장에 데리고 나간 경험을 말했다. 자녀를 동반한 부모의 상당수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거리에서 페퍼포그를 맡고 눈물 흘렸던 386세대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전했다. 3대 신문이 신문시장에서는 독자의 70%를 점유하고 있지만 인터넷 공간에서는 수많은 매체의 일부일 뿐이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촛불시위에 참여했던 386세대 교수는 쇠고기의 안전에 관해 과학이 아니라 정치와 언론 현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촛불시위에 참가하고 귀가한 자녀와 대화를 나눈 과학자는 ‘과학적 이성적 논의의 부재’를 걱정했다. 두 교수의 대조적 태도에서 학문의 경계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 학문의 풍토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수학 과학에 소홀하고, 수학 과학은 정치사회 현상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時流좇지말고 과학적 진실 말해야

지구 온난화, 대체 에너지, 배아 줄기세포, 인간 DNA의 개량, 유전자변형(GM) 식품의 안전성 같은 국가적 세계적 과제에 관한 결정을 과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겨둘 수는 없다. 과학자들의 주창으로 시작된 식물 연료는 곡물 파동 같은 부작용만 일으키고 실패로 결말이 나고 있다. 그러나 과학과 이성에 입각한 논의가 실종된 사회는 국가적 어젠다에서 합리적 의사결정을 해나가기 어렵다. 인터넷 포퓰리즘이 활개 치는 세태에서 시류(時流)를 좇기는 쉽지만 과학적 진실을 말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알려왔습니다]본보 21일자 칼럼

본보 21일자 칼럼 ‘과학과 이성’과 관련해 미국에서 판매되는 햄버거에 대해 맥도날드는 미국산 쇠고기의 경우 30개월 미만을 사용하며, 버거킹은 글로벌 공동 기준에 따라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만을 사용하고 있다고 밝혀 왔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판매하는 두 회사 브랜드 햄버거는 호주 뉴질랜드산 쇠고기만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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