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80년 맥아더 장군 출생

  • 입력 2008년 1월 26일 02시 49분


코멘트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을 남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880년 1월 26일 미국 아칸소 주에서 태어났다.

미국 육군 장군이었던 아버지(아서 맥아더)를 둔 맥아더 장군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나갔다.

1903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 그는 190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군사부관을 맡았고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단 참모장과 사단장을 차례로 지낸 데 이어 1919년 39세의 나이로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연소 교장으로 부임했다. 1930년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그는 1937년 57세의 나이로 전역했다.

그러나 그가 군인으로서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그 이후다. 1941년 고조되는 전시 분위기에서 그는 극동 총사령관으로 컴백했다. 1942년 일본의 공습으로 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보았다는 태평양 전쟁을 그는 3년 만에 승리로 이끌어 냈다.

옥수숫대 파이프, 레이밴 안경을 걸치는 멋쟁이였던 그는 화려한 군 경력으로 인기를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1948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미국 군인의 꿈이라 불리는 은성무공훈장을 일곱 차례 수상했고, 미 육군 역사상 4명밖에 없는 5성 장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독단성과 명예심은 주변과의 갈등을 야기해 평생 큰 짐으로 따라다녔다. 그는 6·25전쟁에서 미 국무부의 정책에 어긋나는 북진을 주장했고, 만주 지역에 50여 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구상을 사전 상의 없이 공개해 백악관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1951년 그는 연합군 사령관에서 해임됐으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등 동료 장군들의 전과를 평가 절하하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정적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조지 마셜 국무장관은 “명예욕으로 가득 찬 군사모험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가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를 위해 우리 청년들이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라고 말한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털에 맞서 참전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것도 그였다. 국내 진보 단체들이 2004년 인천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다가 논란을 빚었다. 1998년 인천지역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는 인천을 상징하는 역사적 인물 1위로 맥아더 장군이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노병’은 사라졌지만 6월 25일이 돌아오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이로 되살아나는 셈이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