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88년 영국 죄수 788명 호주 도착

  • 입력 2008년 1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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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8년 1월 18일. 788명의 죄수를 실은 영국 함선 앞에 미지의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 포츠머스 항에서 출발해 2만4000km를 항해한 끝에 도달한 곳은 호주의 동쪽 보터니 만이었다.

252일을 쉬지 않고 왔건만 이들은 짐도 풀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보터니 만은 물이 얕아 정박하기 힘들었고 식수 확보도 여의치 않았다. 배는 북쪽으로 더 올라가 1월 26일 잭슨 항에 비로소 닻을 내렸다. 항해를 지휘한 아서 필립 총독은 당시 본국 내무장관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 그곳을 ‘시드니’라 칭했다.

영국이 죄수들을 이역만리로 대거 유배시킨 건 넘쳐나는 죄수들을 수용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 빈민이 급증하면서 영국 전역에선 좀도둑들이 들끓었다. 범죄를 막기 위해 서민들에게 법을 더 엄격히 적용하다 보니 죄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계를 훔치면 종신형에 처할 정도였다. 당연히 감옥은 장기수들로 넘쳐났다.

영국 정부는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 버지니아 등지에 죄수를 보내 수용 문제를 해결해 왔다. 그러나 1776년 미국이 독립을 하면서 더는 죄수를 보낼 수 없게 되자 호주를 새 유형지로 주목한 것이다.

초기 호주 정착민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없이 죄수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척박한 땅에 뿌린 씨앗은 더디게 열매를 맺었고, 의지할 것이라곤 본국에서 오는 약간의 생필품뿐이었다. 죄수와 간수 누구도 인도양 한복판에 떠 있는 황량한 대지에 발을 딛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나 1851년 시드니 북서쪽의 배서스트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호주는 기회의 땅으로 바뀌어 갔다. 사상 최대 금광이었던 발라라트와 벤디고에는 유럽과 미국,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부 백인과 중국인들의 격한 채금 경쟁은 아시아 이민 제한으로 이어진 백호주의의 뿌리였다.

영국인 죄수들이 뿌린 건국의 씨앗에 골드러시와 획기적 농업기술이 더해져 호주는 1901년 1월 1일 연방제 국가로 거듭났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호주는 인구 2100만 명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 3만7000달러의 선진국이 됐다. 농업 강국인 호주는 중국과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나라의 4대 무역 파트너이기도 하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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