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 칼럼]누구를 향한 분노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04년 3월 26일 18시 41분


지난해 이맘때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 해방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발전의 첫발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1년이 지난 지금 보면 턱도 없는 소리다. 이라크 침공 의도가 어땠든 종족분쟁은 격렬해졌고 지구촌 테러 공포는 더 극심해졌다.
이유를 분석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중 에이미 추아라는 예일대 교수가 최근 주목받는 저서 ‘불타는 세계’에서 제기한 게 있다. 급작스러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만나면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이론이다.
▼소수의 ‘가진 자’가 문제다 ▼
민주주의는 다수에게 힘을 주는 제도다. 반면 시장경제는 소수에게 열매가 돌아가기 쉽다. 이라크에선 소수세력인 수니파가 이미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담 후세인의 철권독재가 무너지자 입때껏 억눌려 왔던 다수의 분노와 복수심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추아 교수는 이에 종족갈등이 겹쳐져 더 심각하다고 했다. 우리는 단일민족 국가여서 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단일민족 맞나 싶다. 생각은 물론 사는 모습과 더러는 외양까지 달라 한눈에 ‘종족’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니 말이다.
지금 탄핵을 반대하는 70%의 여론, 촛불집회에서 번지는 불꽃은 민주주의 의식으로 가득한 다수가 수십년간 부당하게 시장을 지배해 온 ‘소수 종족’을 향해 터뜨리는 분노라고 볼 수 있다. 검은돈으로 권세와 지위를 누리고, 부정부패와 탈세 투기로 부를 늘려 온 지배세력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는 사회 변화 욕구가 터져나온 것이다.
민주화됐다지만 정직하게 노력해선 집 한 칸 장만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많이 배우고 출세한 소수의 가진 자들이 어떻게 부와 권력을 굳혀 왔는지는 낱낱이 드러났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그들이 몰아낸다고? 우리처럼 힘없는 대통령이 이제 좀 뭔가를 해 보려는 차에?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상관없이 판가름은 벌써 난 분위기다.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고 대통령은 제자리로 복귀하리라는 것이 이심전심이다.
사실상 재신임된 대통령은 대선 당시 공약했던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펼 테고, 대통령 발목을 잡았다는 보수 수구세력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다수의 지지를 받기 힘들 것 같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독점해 온 이들도 삶의 자세를 바꿔야 할 거다. 그리하여 모두가 잘사는 균형사회가 온다면 이번 ‘시민혁명’은 하늘이 준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뜻밖의 복병이 있다. 우리 민족의 고질병인 집단건망증이다. 탄핵결의안이 통과된 순간 환란 이래의 최저경제성장도, 그게 다 지난 정권의 유산이라는 국정최고책임자의 책임회피도, 무능한 국정운영도 죄다 잊혀졌다. 중요한 건 노무현 대통령이 집무실로 돌아오는 순간 ‘탄핵사태’ 역시 잊혀지고 그때 그 문제와 분노가 곪아터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태 이전을 돌이켜보자. 부정한 돈을 받고도 향토장학금이라거나 대통령 체신 유지비라고 믿는 것이 참여정부의 도덕성이다. 빚 탕감부터 비정규직 문제까지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해 주겠다는 ‘로빈후드 경제’로 글로벌경쟁시대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안하다.
더 두려운 건 법과 시스템을 무시하는 이 정권의 버릇이다. 아무나 법과 시스템이 우습다며 들고 나서도 어쩌지 못할 판이다. 게다가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 탓으로만 돌리니 노무현 정부의 실정은 바로잡아지기 힘들다. 이를 지적하면 악의적이라고 몰린 것이 언론이었다.
▼권력 비판의 正論은 계속돼야 ▼
탄핵반대 여론 속엔 이른바 보수언론을 향한 분노도 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바로 언론의 존재 이유라고 배웠다. 사랑받는 대통령이라고, 약한 척한다고 ‘맞습니다. 맞고요’만 하면 언론이랄 수 없다. 독자로부터 알 권리를 위임받고도 민심이 못 보는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죄짓는 일이다.
여론은 뜨거울 수도 있고 돌아설 수도 있지만 정론은 그렇지 않다. 한 정권보다는 언론의 사명이, 대한민국이 더 막중하다. 혼탁한 세상에서 바른 언론을 가려내는 건 깨어 있는 독자들의 몫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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