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주홍글씨

  • 입력 2001년 7월 4일 16시 03분


지난 5월 7일, 김응룡 감독의 발등을 찍고 퇴출되었던 살로몬 토레스의 대체용병으로 발비노 갈베스를 영입한다는 라이온즈 구단의 발표가 난 이후, 한국의 스포츠신문 기자들은 신바람이 났으리라... 시간과 지면과의 전쟁에 시달리며 ‘소스’의 확보를 위해 눈에 불을 켜야 하는 그들에게, 일본에서의 숱한 ‘奇行’으로 악명 높았던 그의 영입은 더할 나위 없는 이야깃거리였으리라. 일본야구에 별다른 관심없는 팬들도 이종범의 머리에 직격투를 날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리라.

연일 스포츠 언론을 통해 그의 일본에서의 ‘행적’들이 보도되었다.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를 달게 했던 98년 7월 31일의 對 한신戰 사건도 ‘살인구’와 같은 지극히 자극적인 수식과 함께 보도되었다. 일본에서 그가 받았던 연봉을 고려할 때 ‘당연히’ 상한선을 넘었을 그의 몸값에 대한 논란도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이미 시즌에 돌입한 후의 시장에서 좀체 구하기 힘든 대어를 낚은 삼성구단도 이러한 주위의 시선이 못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라이온즈 구단의 홍보팀 관계자들은 갈베스의 영입이 확정된 이후 對 언론 로비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각 구단의 코칭스탭들도, 그의 독특한 이력을 의식한 듯, ‘만약 갈베스가 한국에서도...’ 라는 가정법의 수사를 통해 ‘경계’와 ‘사전경고’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갈베스는 경기장에서 상대할 타자들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비롯한 ‘이미지’, ‘선입견’과의 싸움을 먼저 시작해야만 했다.

그가 첫 선을 보인 것은 5월 18일의 對 한화戰이다. 입국 후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스트라이크존을 존중하겠다’는 원론적인 코멘트를 남긴 그는 6이닝 동안 7안타 4볼넷 7삼진을 기록하며 첫 승을 거둔다. 그러나 이 날 경기에서 그가 몇 차례 한화 타자들의 어깨 쪽으로 붙인 ‘몸쪽 공’에 대한 이광환 감독의 강한 불만이 제기된다. 5월 24일의 對 현대戰에서 2승째를 거둔 이 날, 필립스를 상대로 슬라이더를 구사하다 첫 ‘死球’를 기록한다. 6월 5일의 對 두산戰, 5회초 1사에서 심재학에게 구사한 체인지업이 그대로 발목을 강타한다. 7회말, 마해영과 진갑용이 박명환의 직구에 가격 당한다. 이미 대타로 기용되었다 교체되어버린 김동수는 마스크를 쓸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경기를 마친 후 진갑용은 손가락 골절로 전치 4주 진단을 받는다. 주전포수이자 실질적인 중심타자를 잃은 삼성은 이틀 뒤의 경기에서 임창용을 통해 홍성흔을 가격하며 앙갚음을 한다. 물론 정황상, 5일 경기에서 보여준 박명환의 투구에서 고의성을 찾기는 어렵다. 0-1로 리드 당한 팀의 투수가 7회에 선두타자를 맞힐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갈베스가 갖고 있던 ‘惡名’과 각 구단의 경계의식은 이 날 사건 이후 계속 증폭된다. 이광환 감독의 ‘그런 식으로 나오면 삼성도 몇 명 업혀 나가야 할 겁니다’ 라는 멘트도 이 무렵의 일이다.

6월 10일의 對 SK戰, 이번엔 이호준과 최태원이 사구를 얻어낸다. 바로 전날 경기에서 배영수의 투구에 목을 맞고 쓰러진 브리또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강병철 감독이 격양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사단은 6월 21일 열린 대구구장의 對 한화戰에서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 극적인 승리를 거둔 이광환 감독이 경기 종료 후, ‘전쟁’이라고 명명했던 이 날 시합에서 양팀의 선발투수들이 상대팀의 간판타자를 ‘저격’함으로써 일어난 논란은 인터넷의 각종 스포츠 게시판을 한동안 뜨겁게 달구어 놓기도 했다. 당시 ‘저격수’ 역할을 수행했던 두 투수들의 ‘의도’ 자체를 쉽게 예단하긴 어렵다. 먼저 ‘스타트’를 끊은 임창용이 1회초부터, 2사 1루 상황에서 장종훈을 고의로 맞추었을 개연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임창용의 前歷과 상황의 미묘함은 新舊 국민타자 두 선수를 희생양으로 만들게끔 했다. 사건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이광환 감독이 지나치게 예민하게 대응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사구 1구, 1구에 ‘산술적 평균’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 남을 것은 분란밖에 없다.

이런 정황을 뻔히 지켜보고도 갈베스의 ‘소신투’는 계속되었다. 바로 뒷날, 對 현대戰에서 박경완을 상대로 또 한 차례 사구를 기록하고, 곧 이어 현대의 즉각적인 대응이 이어진다. 논란이 계속되는 와중이나, 그의 투구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6월 28일의 對 한화戰에서 또 한 차례 완봉승을 기록하며 시즌 7승째를 기록한다. 3연속 완투승이자 시즌 2번째 완봉승, 1.78의 방어율. 5월 18일부터 8차례의 등판 동안 패전은 단 하나 뿐, 8경기 모두 Quality Stars를 기록하는 놀라운 피칭을 선보인다.

프로 초창기의 ‘장명부’란 이름을 팬들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선동열 이전의 한국야구의 에이스들이 커리어 하이 시즌에 기록한 많은 승리가 상당부분 구원승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36경기 완투, 8연속 경기 완투, 26경기 완투승을 기록하며 ‘시즌 30승’이라는 괴기스러운 성적을 올린 그는, 프로리그에서 ‘브러시 백’을 ‘상용화’한 첫 투수이기도 하다. 얼굴로 날아오는 위협구에 혼비백산해 뒤로 쓰러진 타자가 얼이 빠진 모습으로 마운드를 쳐다봐도… 능글맞아 보이는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그였다. 장종훈과 이승엽 이전의, 80년대의 ‘국민타자’들도 그의 구질과 심리전 앞에선 항상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후의 한국야구사를 다 뒤져도 그만큼 홈플레이트와 타자 사이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를 찾기는 쉽지 않다. 갈베스의 투구에서 장명부를 연상하는 것은 이효봉 해설위원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곧 규정 이닝을 채울 갈베스는 모든 타이틀 부문의 선두권에 이름을 올려놓을 것이다. ‘왜들 내 몸쪽 공에 민감한지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 몸쪽 공을 던질 것이다’는 코멘트가 보여주듯, 갈베스의 투구스타일은 앞으로도 변화를 겪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앞으로도 논란은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듯, 그는 탁월한 투수이다. 9회가 되어도 150km/h에 육박하는 수치를 기록하는 그의 스피드와 스테미너, 루상에 주자가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그의 제구력, 홈플레이트와 타자 사이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격적인 승부근성... 최고의 용병이라는 수식을 넘어서, 선동열 이후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그에게 가격 당한 타자들과 심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하듯, 그의 사구 자체에 ‘맞히고 말겠다’는 명확한 ‘의도성’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의 몸쪽 공은 다른 코스의 공의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위협’ 그 이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무사사구 완봉을 할 수 있는 투수가 공을 그렇게 던져?’, ‘몸쪽 공을 잘 던지는 투수라고 들었다. 그러나 가끔 엉뚱한 공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위협구는 왜 던져?’ 라는 타 구단 감독들의 지적은 그의 ‘능력’에 대한 인정과 함께, 그가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선택하는 투구패턴에 대한 불만을 담고 있다. ‘맞히겠다’는 투구와 ‘맞아도 상관없다’는 투구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직까진 갈베스가 그러한 타구단 감독들의 ‘충고’에 자신의 투구패턴을 수정할 이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를 ‘怪人’, ‘전과자’ 등으로 불리게 한 그의 독특한 이력이 한국에서의 활동에 장애가 될 이유는 없다. 물론 빈볼이나 지나친 위협구가 옹호되어선 안 된다. ‘효율’을 추구하기 위한 투구패턴, 타자와의 ‘기싸움’, ‘홈플레이트 안쪽에 대한 점유권’ 등이 ‘페어플레이’와 ‘동업자 정신’의 범위를 잠식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갈베스의 경우, 그가 선택한 ‘효율’이 그러한 ‘가치’를 침해하고 있다는 현저한 징후가 아직까진 보이지 않는 지금, 그리고 새로운 야구 인생을 시작한 한국에서의 ‘갱생의지’에 대한 충분한 관찰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지금, 또 한 차례 주홍글씨를 새기기 위한 준비를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갈베스는 나머지 7개 구단의 집중적인 분석의 타겟이 되고 있을 것이다. 이종범이 밝힌 ‘갈베스 파해법’에서 볼 수 있듯, 그의 페이스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략법과 치열한 신경전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러한 시도 속에서, ‘공존의 틀’을 무너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한국무대를 평정해간다면… 그에게 박수를 아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가 한국야구사의 페이지를 장식할 대투수로 이름을 남길지, ‘畸人’, ‘怪物’로 이름을 남길지 지켜보자.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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