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보기자의 반집&한집]오랜만에 마주앉은 사제, 돌부처 어이없는 실수

  • 입력 2001년 1월 10일 19시 20분


오후 2시부터 재개된 바둑은 한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대국에서 예상과는 달리 100수 가까이 빠르게 진행되던 바둑이 중반 고비를 맞이하자 두 대국자가 장고를 거듭해 30여수 진행되는데 3시간 넘게 걸리고 있었다. 조훈현 9단은 평소 습관대로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고, 이창호 9단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빈도가 차츰 늘어났다.

9일 서울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열린 조 9단(백)과 이 9단의 44기 국수전 도전자 결정3번기 1국.

두 대국자가 특별대국실에서 만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90년대 중반 바로 이 곳에서 25번기, 27번기 등 수없이 많은 도전기를 두었던 그들이지만 이후 신예 기사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차츰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지난해에는 두 대국자가 딱 세 판을 뒀을 뿐이다. 명인전 도전기에서 이 9단이 3대0으로 조 9단을 셧아웃시키며 우승을 차지했다.

검토실 기사들은 지금같은 진행 속도라면 제한시간이 4시간인 만큼 오후 8시, 늦으면 9시가 돼야 끝나겠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5시 무렵 대국실과 연결된 폐쇄회로 모니터를 지켜보던 양재호 9단은 장면도 흑 1이 놓여지는 것을 보자 “어, 저건 뭐지. 이 9단이 이런 간단한 수도 못보나.”하고 바둑돌 위에 백 한점을 내려놓는다.

[장면도]

흑 1을 본 양재호 9단은 당장 “백 ‘가’ 등의 맥점을 보지 못한 실수”라고 잘라 말했다. 흑 5가 마지막 기회를 놓친 수. 이 수로는 6에 두어 우상 흑 대마를 살린 뒤 백이 5로 흑 석점을 잡을 때 ‘나’의 패를 계속해야 했다. 물론 이 길도 흑에게 유리한 건 아니지만 실전처럼 백 6의 곳에 이어 우상 흑대마가 한 집도 없이 쫓기는 상태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장면도 ‘가’의 맥점.

“이걸로 흑(이 9단)이 크게 곤란해 졌어요. 우상 흑 대마의 삶이 불분명해요.”

백 138(장면도 백 6)을 본 이 9단이 곧 돌을 던졌다. 오후 5시 5분.

국후 검토 때 패자 쪽의 잘못된 수가 주로 지적되지만 이번 바둑은 이 9단답지 않은 실수가 많았다.

이 9단은 최근 춘란배에서 중국의 신예 콩지에(孔杰) 5단에게도 어이없이 무너졌다. 이 9단의 바둑이 요즘들어 불안정하다는 게 주변의 지적. 어딘지 모르게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들은 이제 국수전 승부가 볼 만해졌다고 말한다. 1국을 이 9단이 이겼다면 도전권이 이 9단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지만 이젠 50 대 50의 승부라는 것.

두 대국자 모두 이번 국수전에 도전하고 싶은 심정은 마찬가지. 현 국수인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갚을 빚이 많기 때문이다. 이 9단은 4연패의 사슬을 끊기 위해, 조 9단은 지난해 국수위를 빼앗긴 앙갚음을 하기 위해.

하지만 두 대국자는 승패를 떠나 평소보다 길게 1시간 정도 복기를 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는 듯이.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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