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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기자의 시네닷컴]귀신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상이다

입력 2000-07-28 18:59업데이트 2009-09-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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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9일 국내에 개봉된 일본영화 '링2'는 이미 '링'을 본 사람들에겐 싱거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링'의 주인공들은 우물에서 사다코의 시체를 건져내고 비디오테이프의 저주를 푸는 열쇠를 찾았지만 '링2'에서도 사다코의 저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링2'는 '링'이 어떤 영화인지를 상기시키는 데 상당량을 할애하고 있어 새로운 이야기라는 느낌이 덜하다. 공포감도 '링'만 못하다.

내가 '링'을 처음 접한 건 베스트셀러였던 소설도, 일본영화도 아니고, 일본영화를 리메이크한 한국판 '링'이었다. 공포영화를 보며 정말로 무서웠던 적이 많지 않은데 집에서 밤에 혼자 '링'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비디오를 끄고도 컴컴한 TV 수상기에서 소복차림의 배두나가 기어나오는 장면이 자꾸 생각나 얇은 모포로 TV를 덮어놨을 정도였으니…. 지금도 꺼놓은 TV앞을 지날 때 검은 브라운관에 내 얼굴이 반사되어 비칠 때면 '링'이 생각난다.

흉측한 신체 훼손, 피튀기는 난도질 장면도 없고, 화면보다 앞질러 사람을 놀래키는 으스스한 사운드도 많지 않은데 '링'이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아마 누구나 갖고 있는 일상적 매체인 TV와 비디오테이프가 공포를 야기하는 근원으로 쓰였기 때문 아닐까.

귀신보다 사람이, 모르는 이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익숙한 사람이나 사물이 어느날 갑자기 낯설고 위협적인 대상으로 돌변할 때 야기하는 공포는 비현실적인 귀신, 살면서 거의 만날 일이 없을 것같은 괴한이 자아내는 공포보다 훨씬 더 섬뜩하다.

얼마 전 소리소문 없이 개봉돼 흥행에 꽤 성공했던 공포영화 '데스티네이션'에서 오싹한 공포의 진원지도 일상 공간이었다. 컵의 물이 회로에 떨어진 컴퓨터가 누전으로 폭발하며 깨진 모니터 조각이 목에 박히고, 얼결에 쏟은 부엌 칼꽂이에서 빠져나온 칼이 가슴에 꽂힌다. 미끄러운 욕실 바닥에 넘어지는 사소한 실수로 빨래줄이나 샤워 커튼이 목에 감겨 목졸려 죽는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욕실 부엌 서재 등 일상생활의 친숙한 공간은 목숨을 노리는 죽음의 복병이 똬리를 튼, 저주받은 미로이다.

이 쯤 되면 공포영화는 더 이상 현실에서 억눌린 욕망을 표출하고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욕망의 대리 실현 공간이 아니라 일상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를 일깨워주는 거울이 된다.

'현대는 다양한 위험이 내재되고 일상화된 사회'라는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말처럼, 신뢰 위에 구축되어야 할 현대의 복잡한 시스템과 첨단 시설이 안전그물망이라 할 신뢰를 스스로 잃게 되면 흉기와 재난터로 돌변한다. 멀쩡해야 할 백화점과 다리가 맥없이 무너지는 이 땅에서는 특히 그렇다. 공포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 속 공포를 견디며 마치 뭔가를 해낸 듯한 대리 만족감을 얻게 되지만, 늘 비디오를 끄면서, 극장문을 나서면서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건, '영화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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