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인터뷰]김희애 "제가 영애라면 폐인 됐을걸요"

  • 입력 2003년 11월 24일 17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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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SBS
사진제공 SBS
《늦가을에 추위를 재촉하는 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안개에 싸인 호수 주변 잔디밭에 뎅그렇게 놓여 있는 외로운 벤치…. 너무나 짧게 남은 인생처럼, 가족과 함께한 마지막 가을 여행도 비에 쫓기듯 너무나 짧게 끝나는 듯했다.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극본 김수현·연출 곽영범)에 출연하고 있는 탤런트 김희애를 최근 경기 이천시의 한 펜션에서 만났다. 이날 야외 촬영 장면은 특발성 폐섬유증이란 희귀병에 걸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영애(김희애)가 “죽기 전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고 해서 온 가족여행. 김희애와 펜션 내부의 소파에 마주 앉았다. 》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에서 ‘신들린 연기’를 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김희애. 1주일에 6일씩 촬영을 강행군하고 있는 김희애는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선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서 과감히 손을 뗐다. 그리고 매일 밤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자기 방에서 수험생처럼 대본 연습에 몰두한다고 한다. 주말에 TV를 보며 연기를 모니터할 때도 미묘한 감정이 드러나서인지 남편과 아이들을 내보낸 채 방에서 혼자 본다고 했다.

●아이 일찍 재우고 수험생처럼 대본외워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불치병 때문에 욕조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내 영애(김희애)를 시우(차인표)가 직접 목욕 시켜주고 있다. 19일 녹화된 이 장면(30일 방영)에서 차인표는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실제로 눈물을 흘리며 김희애의 머리를 감겨줬다. 사진제공 SBS

김희애는 “최선을 다한 연기가 의도치 않았던 ‘오버’로 이어지지 않을지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극중 주인공인 영애는 10여년 동안 가정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완벽한 주부. 결혼을 반대한 시아버지로부터 “10년 됐으니 사표 써라”는 등 갖은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가정을 지켜왔다. 시댁 식구들은 영애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 김희애도 1996년 결혼한 뒤 아이를 키우는 등 주부로서의 생활에만 몰두해 왔다. 그가 7년 만에 연기 생활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한 가지에 푹 빠지는 자신이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결혼 전에는 일에 빠졌고, 결혼 후에는 아이들 키우는 일에 푹 빠져 지냈어요. 그런데 너무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이 나중에 ‘상처’로 남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이나 말을 가슴에 묻고만 지내면 90% 암이 된다잖아요.”

영애는 죽음을 앞두고 남편의 오랜 친구 지나(이승연)에 대해 처음엔 질투도 하지만, 나중엔 남편과 아이들을 ‘인수인계’할 것을 생각한다. 김희애는 “실제 제가 시한부 인생을 통고받는다면 바로 까무라쳐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폐인이 될 것”이라며 “나는 영애처럼 죽음 앞에 침착하지도 못할뿐더러 나대신 남편을 뒷바라지 해줄 여자를 인정할 만큼 넉넉하지도 못하다”고 말했다.

●"결혼도 어렵지만 이혼은 더 어려워"

김희애는 극중 자주 거론되는 이혼에 대해 “결혼 전에는 부부들이 툭하면 이혼하는 줄 알았지만, 막상 결혼해보니 결혼도 힘들지만 이혼은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사람 인연 끊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서 김희애는 “아참, 고현정씨는 왜 이혼했대요? 뭔가 아는 거 없어요?”라며 평범한 주부처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기자에게 물었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완전한 사랑'의 인기비결

연인이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맞는 내용은 영화나 드라마뿐 아니라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등 대중문화에 흔히 쓰이는 소재. 특히 경제위기 등으로 힘겨운 상황일 때 공감을 얻는다.

영화 ‘러브스토리’는 위악적인 아버지 세대에 맞서는 자유로운 청년문화의 순수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드라마 ‘가을동화’나 ‘여름향기’, 영화 ‘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연인의 불치병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수한 사랑,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운명적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러나 드라마 ‘완전한 사랑’은 불치병을 소재로 했지만 이런 작품들과 다르다. ‘순수한 사랑’ 대신 ‘현실적인 욕망’이 전면에 드러난다. 10여년간 시댁 식구들의 갖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해 왔던 주부가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억울해 하고, 황당해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버티고 살아왔던가, 나의 욕망은 무엇이었던가. 외환위기 때는 ‘6남매’ ‘덕이’ 등 TV드라마에서 가족을 위해 무조건 희생하는 여성상이 강조된 반면, ‘완전한 사랑’에선 죽음을 앞두고 여성의 눌려있던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된다. 주부 시청자들은 이러한 여성의 심정적 폭발에서 묘한 쾌감과 공감을 느낀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한국예술종합학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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