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271>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 입력 2004년 10월 4일 19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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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장군께서는 내일 하루 동문 쪽을 맡아 성을 들이치다가 해가 지면 에움을 풀고 동쪽으로 가시오. 말발굽은 헝겊으로 싸고 군사들에게는 하무를 물린 채로 가야 하니 길은 더디겠지만, 날 새기 전에는 한단(邯鄲)으로 빠지는 관도(官途) 곁의 골짜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그곳에 군사들과 숨어 조용히 기다리면 늦어도 사흘 안에 사마앙이 그리로 갈 것이외다. 그때 날랜 기병을 내어 길을 끊고 사마앙을 사로잡아 이리로 데려 오시오.”

그런 한신의 말에 관영이 얼른 믿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사마앙이 한단을 거쳐 제나라로 갈수도 있겠지만, 정도(定陶)로 빠져 팽성으로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모처자가 모두 팽성에 끌려가 있다 하니 오히려 그쪽을 지키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마앙도 약하고 비굴한 것을 못 참는 항왕의 성격을 잘 알 것이오. 그저 한 목숨 부쳐 팽성으로 달아나서는 가솔들은커녕 제 한 몸도 건사할 수 없소. 항왕에게 군사를 빌리더라도 싸워서 제 땅을 되찾는 길만이 살길이니, 반드시 항왕이 있는 제나라로 갈 것이오.”

한신은 그렇게 잘라 말하고 다음날 아침 전군을 들어 조가(朝歌)를 들이쳤다.

한신의 말을 옳게 여긴 관영도 군사들을 휘몰아 금세라도 성문을 깨고 들이닥칠 듯 요란하게 동문을 짓두들겼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자 보기(步騎) 5000을 이끌고 가만히 동쪽으로 떠났다. 밤길을 걸어 조가 동북쪽 30리쯤 되는 골짜기에 이른 관영은 그곳에 군사를 숨기고 은왕 사마앙이 가까운 관도로 쫓겨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 한신은 다시 아침부터 전군을 들어 조가 성(城)을 매섭게 들이쳤다. 전날과 달리 한군(漢軍) 장졸들이 성벽에 구름사다리[운제]를 걸치고 갈고리 달린 밧줄을 성가퀴에 걸어 성벽 위로 기어오르자 그러잖아도 겁을 먹고 있던 은왕 사마앙의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하루 낮은 그럭저럭 버텨내는 시늉을 했으나, 그날 밤이 되자 구석구석 성을 빠져나가 한군에 투항해버렸다.

하룻밤 새 알아보게 줄어든 군민을 보고 사마앙은 낙담했다. 다시 한군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장졸들을 무섭게 몰아대 간신히 버티고는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성을 지키기는 글렀다 싶었다. 급한 곳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 뛰어다니면서도 어디로 빠져 나갈까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나절을 싸우다 보니 한군데 빈 곳이 보였다.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한단으로 빠지는 길이 있는 동문 쪽이었다. 전날부터 공격이 뜸하다 싶더니, 그날도 그쪽으로는 아무런 공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에워싸고 있는 군사도 없는 듯했다.

“한왕은 내가 패왕이 있는 팽성으로 달아날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동북쪽은 상산(常山)이니, 우리를 미워하는 조왕(趙王)과 진여의 땅이라, 동문 쪽을 지키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내 동문으로 치고나가 제나라로 가리라. 가서 패왕께 군사를 빌려 하내를 되찾으리라.”

사마앙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때마침 3월 초순이라 그날 밤은 달이 없었다. 믿는 군사 3000을 뽑아 길 떠날 채비를 시키고 밤이 깊기를 기다리던 사마앙은 삼경이 되기 바쁘게 군사들을 휘몰아 동문을 뛰쳐나갔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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