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76)

  • 입력 1997년 3월 22일 08시 39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31〉 『어떤 다른 마음으로 오늘 여길 찾아온 건 아니에요』 이번엔 또 그가 말을 아꼈다. 『오빠 때문에 온 것도 아니고요』 『압니다.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건』 『또 그때 그 사람을 만나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때 그 일은…』 『오래도록 기억에 담고 있습니까?』 『아뇨. 언뜻언뜻 생각날 때가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그때 그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모른 척하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냥 딱 한번만이라도 그 동안 지나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왠지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쪽은 제 그런 마음을 이해 못할지도 모르지만 누구에겐가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저를 아는 사람 누구에게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요. 아마 이곳으로 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쪽에게라면 그 일 이후의 내 얘기를 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인지도 몰라요』 어떤 땐 단편적으로 이야기를 하다 한번 또 이야기를 시작하면 여자는 거기에 대해 꽤 긴 말을 했다. 『그럼 그때 두 사람의 연애를 집안 사람들은 몰랐던 건가요?』 『알아도 잘 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마 일림이 오빠가 가장 많이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오빠도 우리가 깊은 사이였던 건 몰랐을 거구요』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어죠?』 그는 바로 그 말을 여자에게 물었다. 아홉시 전까지는 기숙사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올 때에도 그렇게 말하고 나왔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이제 기숙사를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다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될 것이었다. 알아서 좋을 일이 있고, 몰라서 좋을 일이라는 게 있었다. 이 경우는 모르는 게 백번 나은 일이었다. 그날 서영이 앞을 지금 이 자리에 와 앉은 여자의 사촌 오빠가 다가왔을 때에도 잠시 그 생각을 하긴 했었다. 이제 기숙사를 나올 때가 되었다고. 그 사람과 그리고 지금 자신을 찾아온 여자와 기숙사가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이 기숙사와 기숙사가 서 있는 땅의 주인들인 셈이었다. 『지금도 전 정신과에 다니며 클리닉을 받아요』 여자의 이야기는 다시 단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 처음 여자를 봤을 때에도 여자에겐 그런 기미가 있어보였다. 그러지 않고는 그렇게 부대를 찾아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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