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심한 듯 살가운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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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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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잘못이 아니야.”

-‘굿 윌 헌팅’(1997년) 중에서
친구의 책가방에 붙어있던 ‘내 탓이오’ 배지를 보고 ‘디자인은 안타까운데 문구가 멋있네’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일이다.

혼자서 되뇌는 반성은 이기적인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죄를 지었다고 입으로 말을 내어 털어놓아 봤자, 죄를 행한 자의 마음만 홀가분해질 뿐 그 죄로 인한 피해자의 사정은 나아질 것 없다. 죄를 지은 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합당한 벌을. 단순명료한 이 시스템이 여러 사정에 의해 적확하게 돌아가지 못한 채 온갖 편리하고 그럴듯한 ‘속죄 시스템’만 넘쳐나다 보니 세상살이가 갈수록 구불구불 험해지는 것 아닐까.

나는 뭐 그리 떳떳하다고. 나나 잘하자. 그렇게 다짐하고 살아봤자, 매일매일 크고 작은 수십 가지 죄를 여기저기 쌓아가며 배회하다 이불 덮고 드러누워 잊으려 애쓰며 잠든다.

내 탓이오.

경이로운 말이지만 부족한 깜냥에 속까지 좁아터진 처지에 한없이 버거운 구호다.

청소부 윌 헌팅처럼 MIT 수재들의 풋내 나는 지식 자랑쯤 말 몇 마디로 뭉개버릴 수 있는 천재가 아니니까. “내가 꿈꾸는 아침은 네 녀석이 한마디 인사도 없이 이 빌어먹을 동네를 떠나 너한테 어울리는 곳으로 꺼져버린 아침”이라고 다그치며 멱살을 잡아주는 불알친구가 없으니까. 몸을 밀치고 고래고래 악을 써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며 끌어안아 주는 로빈 윌리엄스도 없으니까. 비웃는 만큼 비웃음당한다. 주먹질하는 만큼 얻어맞는다. 당연한 일이다.

어제가 부끄럽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흔적이 오롯이 배어 있는 오늘을 부인하거나 삭제할 수는 없다.

온몸과 마음과 정신에 버그가 버글거려 눈앞이 흐릿해도, 원하지 않은 프로그램들이 제멋대로 깔려 걸음걸음마다 오류를 일으켜도, 리부트나 포맷은 안 될 말이다. 컴퓨터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인생이라도 아직 컴퓨터는 아니니까.

사는 건 영화와 다르다고, 문장 그대로 납득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후줄근한 하루를 위로하는 건 “네 잘못이 아니야”처럼 벅차게 부드럽고 애틋한 도닥임이 아니다. 삶을 버텨주는 것이 꼭 그럴싸하게 멋들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건 굳건한 믿음이나 감동적인 고해, 절대적인 신앙처럼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은커녕 수십 수백만 점 부끄럽기 그지없는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웃음 짓기를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기 위해 붙들고 의지하는 대상. 그건 그냥 이불 덮고 드러누워 하루를 잊으려 애쓰다 집어든 머리맡 만화책 속 몇 마디일 수도 있다.

“전해지지 않아도 좋다. 그래도 마음을 담는다.”(‘바텐더’)

몇 해 전 화장실에 멍하니 서서 양치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선배가 툭 던지듯 말을 건넸다.

“지난주 리뷰 재밌더라.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 힘줘서 몰아가면 못 보고 지나치는 부분이 남지 않겠니.”

평범한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은 그리 특별나게 거창한 깨달음이 아닐 거다. 바람에 부대껴 갈 곳 모른 채 끝없이 쪼개지며 흩어져 구르는 작은 돌멩이들 소리. 무심함을 가장하며 억양 없이 전한 선배의 한마디. 다른 세상 떠나신 선배가 내내 평안하시길 기도한다.

krag06@gmail.com

krag
동아일보 기자. 조각가 음악가 의사를 꿈꾸다가 뜬금없이 건축을 공부한 뒤 글 쓰며 밥 벌어 살고 있다. 삶은 홀로 무자맥질. 취미는 가사노동. 음악과 영화 덕에 그래도 가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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