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30>네온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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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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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의 이름을 자랑하든 서울장안이 하룻날 밤 상시관제(常時管制)의 검은 막에 휩싸여 화려한 광채를 일허버린지 이미 4개월, 금 3일 연말의 상가를 위하야 상시관제 일부가 해제됨에 따라 밤거리의 요마(妖魔) ‘일류미네이슌’과 ‘네온싸인’이 등장하야 또다시 거리 사람의 눈을 호리고 있다.” ―동아일보 1937년 12월 4일자》

“밤거리 밝히는 妖魔
한숨짓는 조선 룸펜”
수탈경제의 신기루

1930년대 경성전기주식회사 발행 화보에 실린 경성의 야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30년대 경성전기주식회사 발행 화보에 실린 경성의 야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가스를 채운 유리관에 전류를 통과시키면 색색의 영롱한 빛이 나는 장치. 네온사인이 처음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1893년 미국 시카고 세계박람회였다. 1923년에는 미국의 상점 간판을 네온사인이 장식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1920년대 후반 일본인들이 상권을 형성한 경성의 명치정(명동)과 본정통(충무로) 일대에서 이 새로운 풍경이 등장했다.

1934년 12월 8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네온 가두(街頭) 대매출 기(旗) 아래 한숨짓는 룸펜의 영자(影子·그림자)’라는 제목의 스케치 기사를 보면 연말 네온사인이 빛나는 거리를 보는 감성이 사뭇 현대적이다. “금은 패물과 능라비단이 오색령롱한 일류미네이슌(illumination)에 어울려 눈을 부시게 하고 전차소리 자동차소리 유행곡 레코드소리 어울려서 저문 거리를 휘몰아가지마는 바뿐 때도 한가한 이 거리의 룸펜군은 언제 이 땅에서 자최를 감추게 되는고?” 한반도로 넘어온 일본인과 일제 수탈의 수혜 계층을 제외한 조선 대중에게는 거리의 명멸하는 광채조차 먼 세상의 꿈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경성 거리만 색색 네온으로 물든 것은 아니었다. 1935년 6월 12일 신의주 일대에는 우박이 쏟아졌다. 다음 날 동아일보에는 ‘네온싸인과 가등(街燈) 박탄(雹彈·우박알)에 분쇄, 신의주 일대에 내린 우박에 총 피해 이만여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농작물이나 건물 유리창의 손실보다 네온사인이 깨진 피해액이 컸던 것이다. 1936년 봄에는 창경원 밤벚꽃놀이를 맞아 분수에 네온등을 설치했다. “금년도의 시설로는 춘당지(春塘池)에 직경 약 12메틀(미터)의 장려한 네온싸인의 분수탑을 건립하야 오채의 광파를 못 속에 비치게” 할 것이라고 1936년 4월 25일 동아일보는 전했다.

네온의 시대는 일제의 멈추지 않는 침략욕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경성에 등화관제를 실시했다. 8월 22일 동아일보는 “야시(夜市), 불의의 수면, 네온싸인도 실색(失色)”이라고 전했다. ‘적기’의 공습이 일어나지 않자 12월에는 상시관제를 해제했지만 한번 어두워진 경성의 밤거리가 예전처럼 밝아지지는 않았다. 광복 후 일본 상인들이 물러가고 6·25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뒤 한동안은 ‘밝았던 1930년대 서울 거리’를 그리워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오늘날 발광다이오드(LED)를 사용한 전광판을 비롯해 다양한 조명 기구가 전국의 밤거리를 밝히고 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규제의 한파를 맞기도 했지만 탄생 100년이 넘은 네온사인은 오늘날에도 현대성과 물질적 풍요의 상징물로 건재하다. 늦은 밤 현란한 조명의 유혹을 따라 오가는 인파의 발걸음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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