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소통]‘동대문운동장 공모전’ 우수상

  • 입력 2008년 11월 4일 02시 54분


김현승 강천식 박종호 팀 작품

《타자를 응시하는 눈매가 날카롭다. 프로야구 원년 최고의 투수 박철순의 공 던지는 모습을 담은 대형 간판엔 ‘슈퍼스타 동대문 운동장’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영화 포스터 ‘공포의 왜인구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취임식’이 동시상영작으로 나와 있다.

‘지키는 놈, 부수는 놈, 무관심한 놈’ 포스터엔 ‘애꿎은 놈들만 죽어난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서울 중구 흥인동 충무갤러리(02-2230-6600)에 가면 디지털 시대에 떼밀려 자연 도태된 수작업 극장 간판그림과 포스터를 볼 수 있다.

고교야구의 메카였고,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으며, 성대한 기념식이 치러졌던 역사의 현장. 올해 5월, 81년의 긴 발자취를 남기고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을 스포츠 스타와 시대적 인물을 곁들여 패러디한 작업이다.》

반갑다! 극장간판… 추억도 한 움큼

속에 등장한 제작, 각본, 감독의 이름은 하나같이 ‘김강박’. 충무갤러리가 동대문운동장을 주제로 실시한 공모전에서 입상한 김현승(28) 강천식(37) 박종호(30) 씨의 성을 모아 만든 팀 이름이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극장 간판을 미술의 표현양식으로 불러낸 작업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간판장이’ 강천식

회화와 극장 간판은 테크닉과 재료가 다르다. 그림 좀 그린다고 아무나 손댈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전시에 나온 대형 간판은 강 씨의 솜씨다. 고교 졸업 후 만화가 문하생으로 들어갔던 그는 우연히 간판에 홀렸다. 무턱대고 단성사를 찾아가 청소와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스물일곱 살에 경기 성남시의 개봉관 간판을 처음 그린 이래 5년간 2주마다 셀 수 없이 그렸다. ‘쉬리’가 상영될 땐 석 달 동안 그림도 안 그리고 월급을 탔다. 오래만 걸려 있다면 명화도 부럽지 않았던 시절이라 생각했으나 그리 길지 못했다.

“디지털에 밀려 간판의 회생 가능성이 없어졌으나 그림은 계속 그리고 싶었다. 두 딸을 둔 가장이지만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미대(경원대 회화과 4년)에 들어갔다. 띠동갑 학생들과 어울릴 때 ‘간판장이’란 콤플렉스도 있었지만 이젠 내가 해온 작업에서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감추고 싶던 ‘간판장이’ 실력도 ‘좋은 작업을 두고 다른 작업을 찾느냐’는 스승의 격려 속에 든든한 의지가 됐다. “나다운 것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자기다운 것이 바로 진정성 아닌가. 내가 생각해도 가장 나다운 것은 ‘간판그림’인 것 같다.”

팀의 인연도 간판에서 비롯됐다. 성남에서 극장 간판을 그릴 때 큰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미대생 박 씨가 찾아왔고, 그의 후배 김 씨와 알게 됐다. 셋은 의기투합했다. “그림 그리는 것은 똑같다. 간판이든 벽화든 회화든 그린다는 행위엔 계급이 없다고 생각한다.”(박) “간판은 키치적이며 상업적이다. 누구나 감상할 수 있고, 대중에게 가장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다. 미술의 어려움을 간판이란 형식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보고 싶다.”(김)

#간판의 무게, 추억의 무게

김강박은 전시 마지막 날 ‘슈퍼스타’ 간판을 흰 페인트로 지우는 퍼포먼스를 한다. 극장 간판의 매력은 ‘그리기’ 못지않게 ‘지우기’에 있기 때문. 이는 덧없음과 소멸을 주목하는 현대미술과도 맥이 닿는다.

“영화가 끝나면 간판을 지우고 다시 그린다. 동대문운동장의 ‘사라진다’는 점과 비슷하다.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가벼웠던 화판은 엄청나게 무거워진다. 지워도 흔적은 고스란히 남는 것이다.”(박) “하얗게 지운 뒤 새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재생’이란 의미도 함께 담고 있다.”(김)

낡은 간판의 무게는 추억의 무게와 견줄 만하다. 그 안에 차곡차곡 쌓인 그림은 눈에 보이진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을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사라진 장소를 기억하는 이 전시는 우리에게 새삼 깨우쳐 준다. 서러운 것이든, 눈부신 것이든 추억은 힘이 세다는 것을.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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