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 100년-사랑의 詩]최승자/‘너에게’

  • 입력 2008년 3월 14일 03시 00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가장 단순하고 근원적인 전언은 ‘네가 왔으면 좋겠다’이다. 이 투명한 욕망은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치명적이다’. 네가 오지 않기 때문에 내가 치명적이거나, 내가 치명적이기 때문에 너의 부재가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거나, 그런 이유로 네가 오지 않거나….

당신을 호출하기 위해서 나는 무언가를 보여 주어야 하고, 무언가를 팔아야만 한다. 이 세계에서 나는 ‘쇼윈도’에 갇힌 존재이다. 그런데 나는 ‘목숨’밖에 팔 것이 없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는 고백은 아픈 비명에 속한다. ‘죽은 왕의 초상’ 같은 박제된 내 모가지만으로 사랑을 호출할 수는 없다. 죽은 왕의 초상은 사라진 권력에 대한 조소의 대상일 뿐, 연민조차 자아내지 못할 테니.

아무것도 팔 것이 없는 내 헐벗은 사랑은, 그러나 텅 빈 쇼윈도에서 너를 아직도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만이 가난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나는 치명적이다’라는 고백은 어느새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라는 타자들의 진단이 되고, 두터운 풍문이 된다. 사랑의 불가능성이야말로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역설적인, 가장 치명적인 동인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남루한 고백이 ‘너에게’ 가닿기는 하는 것일까? 이미 신화가 되어 버린 최승자 시의 위악과 마조히즘은, 이 불모의 세계 속에서 사랑의 근원적인 비극성을 예리한 육체의 실감으로 드러낸다.

이광호 평론가·서울예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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