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전율,추리소설 20선]<7>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입력 2007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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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밀라?”

“사소한 부분은요. 하지만 커다란 일들은 저절로 일어나죠.”

얼핏 추리소설 속의 대화 같지는 않다. 다음과 같은 단락도 마찬가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커다란 눈송이, 이사야의 무덤에 내리던 카니크다. 얼음은 아직도 따뜻해서 눈송이는 그 위에서 녹아버렸다.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눈송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지 않고 바다에서 자라나는 것 같다.”

스밀라를 처음 만났던 그해 여름, 책을 펼치면 눈이 내렸다. 책 속에서 불어오는 눈보라, 책 속을 둥둥 떠다니는 유빙(遊氷). 그때 나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있던 누군가와 함께 강원도의 뜨거운 바닷가에 있었다. 나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었고,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읽고 있던 누군가도 읽었다. 폭염 속에서,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했다.

스밀라 야스페르센. 그녀의 몸속엔 야만인의 피와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린란드인 사냥꾼이고, 아버지는 덴마크인 의사다. 그녀는 어머니를 잃으며 야성(野性)의 자유를 빼앗겼고, 오랜 세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야성을 지키려 애쓰며 살아간다. 그리고 한 소년이 죽는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 그녀는 눈과 얼음을 읽어 소년의 죽음에 깃들인 음모와 비밀을 파헤쳐 간다.

어떻게? 야성의 용기로, 문명의 합리로, 아니, 그보다는 온기(溫氣)로.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 속에서, 차디찬 얼음 벌판 위에서 스밀라는 말한다. 이사야의 싸늘한 주검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며 그녀는 우리에게 일러준다. “삶의 본질은 온기”라고. 그것이 그녀의 ‘감각’이다. 그리고 그녀는 녹아내린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 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들은 다시 한결같이 덧붙여 말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 소설은 더없이 아름다운 추리소설이라고.

유혈이 낭자하지 않더라도, 잔인한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추리소설로서 온전히 존재한다. 추리소설보다 더욱 추리소설 같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다. 미스터리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스밀라를 처음 만났던 그해 여름, 책을 펼치면 눈이 내렸고, 나는 비로소 ‘나’라는 사건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이신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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