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21세기 新이념 지형]<2>논쟁의 중심축이 바뀐다

  • 입력 2007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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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0년대 문학의 시대, 1980년대 사회과학의 시대, 1990년대 철학의 시대 그리고 2000년대는 역사학의 시대.

한국지식사회에서 주도 학문 중심으로 시대 담론을 살펴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 같은 시대 담론의 중심축 이동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크게 봐서 인문학→사회과학→인문학의 순환구조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70∼90년대를 한국 주류에 도전한 좌파 담론의 발효·숙성 과정으로, 2000년대 이후는 그 역전의 시작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2000년대 역사학의 부각이 미래 비전에 대한 불확실성과 모호함으로 인한 ‘역사로의 후퇴’가 아니냐는 우려도 존재한다.

현재 한국사회 담론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의 축에서 시대 흐름을 재검토해 본다.》

○예민한 문학의 시대

한국지성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3명 중에는 문인이 2명(김수영, 김지하) 들어 있다. 이는 2005년 교수신문과 KBS의 학계 설문조사 결과로 광복 이후 문학의 영향력을 확인해 준다. 일제강점기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문인 출신이었던 전통은 광복 이후에도 그 맥이 이어져 왔다.

1950년대는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실존주의를 대표한 사르트르와 카뮈의 영향이 컸다. 1960년대는 4·19혁명, 5·16군사정변, 6·3한일회담반대운동 등을 통해 김수영, 김지하 시인으로 대표되는 현실참여형 문학이 시대정신을 대변했다. 특히 1970년대 민족문학과 현실참여를 주창한 ‘창작과 비평’(창비), 예술의 독자성을 강조한 ‘문학과 지성’(문지), 예술의 보편주의를 추구한 ‘세계의 문학’ 등 문예지가 지식 담론의 삼분 시대를 열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울고 일어서는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문학은 시대 변화의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복잡한 이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직관적으로 시대 문제에 순발력 있게 발언할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김윤식(국문학) 명지대 석좌교수는 “문학이 지식 담론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을 앞서 펼쳐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뜨거운 사회과학의 시대

군부독재가 정점에 이르렀던 1980년대 문학이 열어젖힌 현실 비판의 공간을 채운 것은 마르크시즘 이론으로 무장한 사회과학이었다. 한국사회의 성격 규정과 변혁 방향을 놓고 벌어진 사회구성체 논쟁이나 학생운동 진영에서 벌어진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의 노선 투쟁은 이를 상징한다.

그 산파 역할을 한 곳은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산업사회연구회’(현 한국산업사회학회)나 ‘학현연구실’(현 서울사회경제연구소) 등이었다. 혁명 이론으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ML)와 그 변종으로 남미 종속이론과 해방신학, 여기에 그람시의 헤게모니이론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론까지 아울렀다. 이들 변혁 이론은 인간사회에서 자연과학적 법칙의 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국가 대 민중, 자본 대 노동의 선명한 이분법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 국내에서 금기시되던 이들 정치경제학 및 사회학 이론으로 무장한 사회과학 담론은 이후 반독재 저항운동의 양대 수레바퀴였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급속히 대중화된다. 사회과학 담론은 1987년 직선제 쟁취와 개헌을 통해 정점에 올랐다가 1989년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은 사회주의권 붕괴로 급속하게 몰락하는 ‘롤러코스터 현상’을 겪었다.

○차가운 철학의 시대

거대담론의 상실로 대변되는 19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죽비 소리가 요란한 시대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푸코, 들뢰즈, 데리다, 리오타르 등 일군의 프랑스 철학가들의 사상을 뜻하는 후기구조주의와 20세기 후반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나선 예술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혼합된 채 수입됐다. 처음엔 혼성모방과 패러디를 통해 자기 완결적 예술양식으로서 모더니즘을 비판한 문학·예술 담론이 주목을 받았으나 곧 이성 중심의 서구철학을 비판하고 해체한 후기구조주의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했다.

특히 후기구조주의는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과 재해석을 통해 담론을 구축했다. 이는 광복 이후 한국사회에서 교양으로만 유통되던 철학의 재발견을 낳았다. 1980년대 서양철학의 적통으로 주목받던 플라톤과 헤겔이 이성중심주의자와 전체주의자로 비판받은 반면 비현실적 철학자로 거의 잊혀졌던 스피노자와 니체는 탈근대적 사유의 씨앗을 뿌린 철학가로 각광받았다. 관념주의자로 치부되던 칸트 철학의 현재성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이들 담론은 1980년대의 이념 중독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 내지 진통제로 각광받았다. 일부에서는 1980년대 사회과학의 대체재로 이를 적극 수용했으나 일부에선 이의 남용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이들 담론의 유통 과정에서 설익은 이해와 자의적 오독이 곳곳에서 노출됐기 때문이다. 근대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과 해체에만 능할 뿐 대안적 삶을 제시하거나 구성하는 데 취약하며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만 확산시킨다는 이들 담론 자체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치고받는 역사학의 시대

2000년대 들어선 한국사회의 논쟁 대부분이 역사의 지뢰밭에서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등 정부 주도의 17개 역사위원회가 다루는 주제뿐 아니라 근현대사 교과서 논쟁, 해방전후사 인식에 대한 논쟁, 박정희 재평가 논쟁, 탈민족주의 논쟁 등 그 어디에도 역사가 빠지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런 논쟁은 중국 일본 등 동북아 주변국과 역사 해석을 둘러싼 분쟁과도 미묘한 함수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초 한국의 시대 담론 핵심에 역사학이 부상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지현(역사학) 한양대 교수는 사회과학에서 인문학으로 돌아가는 회귀현상으로 설명한다. 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란 저서로 탈민족주의 논쟁을 본격화했고 2000년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친일과 독재에 대한 재해석을 촉발했다는 점에서 현재 역사 논쟁의 씨를 뿌린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임 교수는 역사 논쟁에 대해 “인간사회를 과학법칙으로 포착하려고 했던 19세기 이래 근대과학의 한계를 깨닫고, 그 우연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천착해 온 철학과 역사학의 가치를 새롭게 주목하는 세력과 여전히 낡은 이론에 맞춰 현실을 뜯어 고치려는 세력의 충돌”이라고 말했다.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는 “변화의 바람은 문학의 깃발을 타고 역사·사회과학을 거쳐 철학으로 심화되기 마련”이라며 “1970∼90년대를 이른바 좌파 담론의 숙성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현재는 반대로 현실 권력에서 비주류가 된 세력이 역공을 취하는 단계로 본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사회과학의 시대처럼 보이는 1980년대의 이면에도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민중사학이 작동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2000년대 새롭게 시작된 담론 투쟁의 깃발 역할을 해야 할 문학의 시대는 왜 실종됐을까. 한 교수는 1970, 80년대 참여문학의 선두에 섰던 김지하 시인이 1990년대 생명·생태시인으로 전환한 것을 그 변화의 신호로 포착했다. 김윤식 교수는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이 발표된 1994년을 그 기점으로 풀이했다. 김 교수는 ‘인간은 벌레가 아니다’라는 한국문학의 휴머니즘적 전통이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인간은 벌레와 같다’는 반(反)휴머니즘으로 전환했다고 설명한다. 문학의 ‘역사사회학적 상상력’은 이 작품을 기점으로 ‘생물학적 상상력’으로 전환하면서 현실 담론을 주도할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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