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별]김남희의 ‘영원한 별밤DJ’ 가수 이문세

  • 입력 2007년 11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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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에 서면 가슴속 등불이 일제히 켜진다. 겨울밤, 내 언 볼에 와 닿던 당신의 첫 손길을 기억한다. 봄꽃이 피었으니 꽃을 보러 가자던 수화기 너머 당신의 나직한 음성도. 은행잎이 흩날리던 가을 저녁, 당신을 기다리던 그 거리에서 문득 꿈을 꾸기도 했다.

오래도록 당신과 함께 늙고 싶다고. 거리의 무성한 나무들과 어깨를 기댄 큰 산들이 당신과 나의 봄,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을 지켜봤다. 당신을 만나 사랑하고 돌아선 모든 일들이 그 거리에서였다. 여전히 이 거리에 서면 살아오는 당신의 얼굴. 그리고 당신을 떠올리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노래, ‘광화문 연가’와 ‘옛사랑’.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동서양이 함께 사랑한 ‘별밤’이 있었다. 유럽인들에게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면, 우리에게는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그 시절, ‘별밤’은 청춘의 통과의례이자 고단한 영혼의 안식처였다. “어제 별밤 들었어?”로 ‘0교시’를 시작하고, ‘자율학습’이 끝나면 별밤을 듣기 위해 종종걸음 치던 시절. 사연과 신청곡을 적은 엽서를 보내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통과했다. 그때 ‘별밤’은 사막 같은 학창시절을 지나가야 했던 우리들의 푸른 오아시스였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더는 라디오를 듣지 않게 되었고, 라디오 속 ‘별밤지기’가 아닌 현실의 남자들이 사막의 우물이 되어주곤 했다. 사랑이 지나갈 때마다 노래는 살아왔다. 그렇다 해도 그건 노래에 대한 애틋함이었지 가수에 대한 연모는 아니었다, 결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네팔이었다. 2004년 4월 그는 방송 촬영차 네팔을 찾았고, 나는 그 팀의 ‘현지 코디네이터’라는, 임무가 불분명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가 도착하는 날, 우리는 꽃다발을 주문하는 대신 시장으로 나가 당근을 사재기했다. 싱싱한 초록색 줄기가 그대로 달린 주홍빛 당근을 호텔의 정원 가득 매달았다. 한 시절 유열, 이수만과 함께 ‘마삼 트리오’로 불리던 그의 별명 때문이었다. 당근 꽃다발을 본 그는 웃었고, 내가 내민 당근 주스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먹을거리에서 잠자리까지 모든 것이 열악하기 짝이 없던 히말라야의 생활을 그는 잘 견디는 듯 보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를 보였다. 높은 산에 오르는 용감하고 자유로운 영혼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나이 서른을 훌쩍 넘겨 대책도 없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말했다. “나도 꿈꾸었던 삶이었지만 현실 때문에 포기했는데…. 네가 존경스럽구나.”

일 년에 한 번씩 서울에 돌아올 때면 월요일마다 그와 함께 산에 올랐다. 그는 걸음이 뒤처지는 후배와 보조를 맞추고, 작은 쓰레기도 남기지 않기 위해 늘 자리를 정돈하는 모습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내와 문자를 주고받는 다정한 남편에,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설 줄 아는 아버지였다. 작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것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자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파키스탄을 여행하던 어느 해 봄이었다. 가난한 산간 마을의 소녀들은 수줍고 어여뻤다. 그들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 학비를 보내 달라고 벗들에게 e메일을 보냈다. 가장 먼저, 50명의 학비를 보내온 사람이 그였다.

지난해 가을에도 그랬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을 앓는 어린이들을 위한 사진전을 열었을 때였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사진들 틈에 딱 한 장, 여러 사람이 좋아한 사진이 있었다. 그는 그 사진이 아닌 엉뚱한 사진 두 장을 사들고 갔다. 훗날 그 독특한 취향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답했다. “나도 물론 다른 사진을 사려고 했지. 근데 아내가 속삭이더라고. ‘이 사진은 다른 사람들도 다 탐을 내는 사진이에요. 당신은 아무도 사지 않을 사진을 사세요’라면서.”

알고 보니 그는 벌써 십수 년째 근육병 환자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어오고 있었다. 남을 돕는 일은 돈보다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임을 깨달아 가던 터여서 새삼 그가 멋지게 다가왔다.

가끔씩 내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럴 때면 그에게 편지를 쓴다. 지난여름, 홍해 바닷가에 짐을 풀어놓고 오지 않는 이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였다. 지쳐 가던 어느 날, 그에게 편지를 썼다. ‘지구 위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아요. 이제 그만 돌아갈까 봐요.’

며칠 후 그에게서 편지가 날아왔다.

‘빨리 돌아와라. 이젠 됐다. 정착해도 되겠다. 돌아와 한 여자의 소박하고 예쁜 일상으로 살아보렴. 너의 값진 여행은 지금까지로 충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놈아! 인생은 어차피 외로움의 연속, 그리움의 연속이다. 지금 네가 숨 쉬고 있고, 밟고 있는 그 땅이 너에게는 축복과 은혜의 땅이란다. 그러니 즐겨라. 외로움도 고통스러움도 빈곤함도 즐겨라. 너무 힘이 들면 형의 노랠 큰소리로 부르렴.’

바닷가 끝집으로 돌아온 나는 ‘붉은 노을’을 틀어놓고 노트북의 볼륨을 최대한 높였다. 그리고 악을 쓰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느덧 겨울이 오고 있다. 광화문 거리는 다시 흰 눈에 덮여 갈 것이고, 덕수궁 돌담길로는 다정한 연인들이 걸어갈 것이다. 누군가는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눈물을 쏟기도 하고, 나는 겨울 뒤의 봄을 기다리며 ‘눈 녹은 봄날 푸르른 잎새 위’로 번지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또 기억할 것이다. 그 노래와 함께 살아오는 ‘별밤지기’를. 나에게도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이 하나쯤은 있어도 될 거라 여기며.

■“씩씩한 남식이,아니 존경하는 남희”

“아, 남식이… 아니 남희가 제 이야기를 해요?”

8일 오후 라디오 생방송을 막 끝낸 가수 이문세(48) 씨에게 전화하자 그는 도보여행가 김남희(36·사진) 씨를 ‘남식이’라 부르며 반가워했다.

“조그마한 체구에 남자보다 씩씩해요. 혼자 그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걸 보면 어휴∼. 그래서 ‘남식이’라는 별명을 붙여 줬어요. 남식이는 저를 ‘형’이라고 부르게 됐고요.”

네팔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김 씨와 처음 만난 날도 그는 또렷이 기억했다. 김 씨가 그를 환영하기 위해 문 앞에 걸어 놓았던 당근은 “다 빼먹었다”고 전했다.

그는 “남식이가 대사관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내팽개치고 여행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하면 이 친구의 삶을 배울까 생각했다”며 “내가 감히 시도하지 못한 것들을 남희를 통해서 간접 경험으로 취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얼마 전 이 씨는 갑상샘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그는 “현재 컨디션을 95% 정도 회복했다”며 “근육병 환우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27일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로 20년째 해 오는 일이지만 그는 거듭 “별거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행서 팔아서 받은 적은 인세를 죄다 기부하는 남희도 있어요. 저는 그저 배우고 뉘우치죠.”

현재 스페인 살라망카에 머물고 있는 김 씨와는 자주 통화한다. “얼마 전 영국 공항이라면서 전화 왔어요. 그 친구는 저랑 통화만 하면 울어요. 한국이 그리우니까…. 감성도 풍부하고 감탄도 자주 하고 눈물도 많아요. 한마디로 청승쟁이예요.”

김 씨를 ‘고행 길을 걷는 수도자’라고 표현한 그는 먼 이국만리에서 ‘고행 중’인 김 씨에게 자신의 노래 ‘옛사랑’을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남식아, 한국에 대해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생각나면 생각난 대로’, 알겠지? 조금 그립다고 휙 날아오지 말고, 꿋꿋하게 여행했으면 좋겠어.”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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