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541>蘇 武 牧 羊(소무목양)

  • 입력 2003년 3월 6일 18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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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 武 牧 羊(소무목양)

牧-짐승칠 목 頂-정수리 정 累-얽힐 루

飢-굶주릴 기槪-절개 개 擬-빗댈 의

우리의 廣開土大王(광대토대왕) 쯤에 해당되는 중국의 천자가 漢武帝(한무제)다. 동서남 3방향으로 판도를 크게 넓혀 大漢帝國(대한제국)의 국력을 絶頂(절정)으로 이끌었다. 동으로는 우리나라까지 쳐들어와 漢四郡(한사군)을 설치했음은 다 아는 史實(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북방의 匈奴(흉노)와는 잘 사귀지 못해 衝突(충돌)이 잦았다. 기마민족이었던 탓이다.

기원전 100년, 蘇武(소무)는 武帝의 명을 받들어 수행원 100여명을 이끌고 匈奴로 들어갔다. 親善(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소위 講和使節(강화사절)이었던 것이다.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하려던 차 그만 일이 터졌다. 전에 匈奴에 투항했던 장군 衛律(위율)의 부하 虞常(우상)이 衛律을 죽이려다 실패한 것이다. 억울하게 連累(연루)된 蘇武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下獄(하옥)되고 말았다.

이 때부터 匈奴의 酋長(추장) 單于(선우)는 함께 갔던 사신들을 하나씩 죽이면서 갖은 회유와 협박을 가해왔다. 하지만 蘇武는 단호했다. 蘇武가 굴하지 않고 버티자 單于는 땅을 파고 가두었다. 때는 마침 엄동설한이라 飢寒(기한)이 뼈에 사무쳐왔다. 열흘이 지나 문을 열고 보았지만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목이 타면 눈을 녹여 마셨고 배가 고프면 담요의 털을 뜯어먹었다. 그러면서도 節槪(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單于는 그가 신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숫양 몇 마리와 함께 지금의 바이칼 호수 부근으로 쫓아버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이놈들이 새끼를 낳으면 집으로 보내주마.”

졸지에 양치기가 된 蘇武는 그곳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조국 漢나라에 대한 忠貞(충정)과 천자에 대한 節槪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기를 19년, 마침내 양국의 우호관계가 되살아나 祖國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 동안 갖고 갔던 ‘使節’(사절)을 애지중지 보관하여 다 닳아 없어질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蘇武牧羊(소무가 羊을 치다)은 물론 ‘양을 돌본다’는 뜻의 看羊도 함께 忠節의 상징이 되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丁酉再亂(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가 끝내 節義를 굽히지 않다가 3년만에 생환했던 睡隱(수은) 姜沆(강항·1567-1618)선생이 그다. 제자들이 그의 文集을 看羊錄(간양록)이라 이름 붙였는데 蘇武의 忠節에 比擬(비의)한 것이라 하겠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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