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길상호/‘모르는 척, 아프다’

  • 입력 2007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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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 시집 ‘모르는 척’(천년의시작) 중에서》

모르는 척, 다 아는 것이다. 새가 알 깨고 나오는 아픔을,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 꽃잎도 아는 것이다. 너무 일찍 깨어 꽃 한 송이 만나지 못한 봄나비의 외로움을, 바람은 아는 것이다. 완벽히 감출 수 있는 슬픔은 없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 다 아는 것이다. 철철 눈물 흘리면서도 명랑한 척 촐랑대는 냇물의 속내를, 강물 같은 목덜미의 왜가리가 왜 모르겠는가. 차마 다 아는 척할 순 없어 모르는 척, 내버려 두는 것이다. 아니, 정말 모르는 척하는 이유는 아픔이 곧 꽃이기 때문이다.

- 시인 반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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