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김수열/‘오늘도 버리지 못했다’

  • 입력 2007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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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아 더는 신을 수 없어

신발장 구석이나 차지하고 있는

한갓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나를 데리고 걸어온 숱한 길을 생각하면

살아온 날들조차 폐기처분되는 것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가야할 길만을 걸어온 것도 아닌데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고

가서는 안 될 길을 간 적도 많은데

그래도 나를 데리고 온 길이

한순간에 지워질 것 같아

여태껏 버리지 못했다

어쩌다 술자리에서 바꿔 신었을지라도

그 사람이 걸어온 당당함 혹은 비틀거

림이

나로 하여 사라질 것만 같아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신발장을 열 때마다 아내는

신지도 않는 걸 왜 모셔 두냐며 핀잔

이지만

때가 되면 버린다 얼버무릴 뿐

언제 버려야 하는지

꼭 버려야만 하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 시집 ‘바람의 목례’(애지) 중에서》

누구나 ‘가고 싶은 길’과 ‘가야만 할 길’을 걷고 싶지만, 돌아보면 지우고 싶은 걸음 없으랴. ‘가고 싶지 않고’ ‘가서는 안 될 길’에 발목 빠진 자국 어지럽다. 아무리 지우고 싶어도 어제 걸어온 가장 마지막 걸음 앞에 내가 있다. 그러나, 새들도 반드시 일직선으로만 나는 것은 아니다. 열매를 물고 허기진 새끼들에게 가다 말고 얼음 폭포에 얼비치는 무지개에 취해서 그 열매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궁극 가야 할 곳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당당함도 비틀거림도 삶의 소중한 세목인 것이다.

―시인 반 칠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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