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이면우,“두더지”

  • 입력 2004년 7월 4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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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 이면우

비 갠 아침 밭두둑 올려붙이는 바로 그 앞에

두더지 저도 팟팟팟 밭고랑 세우며 땅 속을 간다

꼭 꼬마 트랙터가 땅 속 마을을 질주하는 듯하다

야, 이게 약이 된다는데 하며 삽날 치켜들다 금방 내렸다

땅 아래 살아 있다는 게 저처럼 분명하고 또

앞뒷발 팔랑개비처럼 놀려 제 앞길 뚫어나가는 열정에

문득 유쾌해졌던 거다 그리고 언젠가 깜깜한 데서 내 손 툭 치며

요놈의 두더지 가만 못 있어 하던 아내 말이 귓전을 치고 와

앞산이 울리도록 한번 웃어젖혔다.

-시집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작과비평사) 중에서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캄캄한 절벽을 손톱으로 긁으며 간다. 녹두알만 한 눈은 있더라도 흔적기관일 뿐이다. 자비심 많은 누가 관솔불을 비춰준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리 내어놓은 신작로 같은 건 없다. 한발 한치를 가더라도 두 발로 뚫고 가야 한다. 삶은 언제나 캄캄함뿐이었으므로 환한 대낮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언제나 절벽이었으므로 평평한 평지 같은 건 믿지 않는다. 자갈과 사금파리 가득한 땅 속 길을 뚫으며 가야 안심이 된다. 길 없는 길로 온몸을 밀어 넣으며 간다. 그러나 길 없는 길을 가는 나는 언제나 새 길의 끝에 서 있으며, 온 세상 희망의 불빛이 꺼져버리더라도 어둠에 익숙한 나를 절망시킬 수 없다.

두더지야, 이 세상 모든 절망을 삶의 조건으로 만든 두더지야. 까짓것, 상추나 고추 몇 포기 뿌리를 들뜨게 만들지라도, 쩍쩍 갈라진 거북등 터널 꼭꼭 눌러 밟으면 그뿐. 얘들아, 저 봐라. 땅 속의 성자가 트랙터 몰고 지나가신다. 흠, 새벽마다 불끈불끈하는 요 방두더지도 글쎄, 성자 축에 끼일까? 요 눈먼 놈.

반칠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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