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기자의 현장칼럼]12만 '붉은악마' 어떻게 조직되나

  • 입력 2002년 6월 6일 18시 23분


4일 한국 축구팀이 월드컵 사상 첫승을 거두고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밤. 전국은 온통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 짝짝~ 짝 짝짝' 함성과 '오~필승 코리아' 노래로 뒤덮였다.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는 대한민국의 상징인 대형태극기와 붉은악마의 상징인 '치우천왕' 깃발이 관중석을 뒤덮었고 붉은악마들은 20세기 전에 서구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이유로 'COREA'라고 쓴 머플러를 빙빙 돌리며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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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모두가 붉은악마로 변해버린 듯한 이날 오전 9시 서울 잠실주경기장 앞. 붉은악마 내 소모임 서울유나이티드 회원인 서주석씨(31)는 경기 포천의 직장에 휴가를 내고 이곳에서 부산으로 가는 단체 전세버스에 올랐다.

미국 포르투갈 등과의 한국전이 있는 10,14일 휴가도 이미 받아놓았다. 축구에 미친 그들, 붉은악마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들을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붉은악마라면 누구나 ‘단관’이 뭔지 안다. 단관은 단체관람을 줄인 말이다. 붉은악마는 응원조직에 앞서 단체관람 조직으로 시작했다. 하이텔 축구동호회 등을 통해 친분을 쌓던 사람들이 1995년경 PC 통신을 통해 ‘○월 ○일 어디에서 만나 축구 같이 보자’는 식으로 연락을 취해 처음 단체관람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축구장 모임이 2년후인 1997년 붉은악마 창립의 모태가 됐다.

붉은악마는 경기장의 홈팀 응원단 자리인 왼쪽 골대 뒤쪽에 모여 단체관람을 시작했다. N구역으로 불리는 이 자리는 경기장에서 가장 관중이 들지 않는 곳. 경기는 주로 그라운드보다는 반대편 S구역 전광판을 통해 봐야하는 곳이어서 입장료가 가장 싸다.

축구협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 한국팀 경기 때부터 이곳에 붉은악마를 위해 3000석을 우선 배정해 왔다. 입장권 경쟁이 치열했던 월드컵의 D조 한국전 3경기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붉은악마가 경기의 종류에 관계없이 늘 3000석을 사전 확보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최근 한국-프랑스 평가전의 경우 개인적으로 구입가능한 표가 1만장이었는데 붉은 악마가 3000장을 갖고 가는 것이 형평에 맞느냐는 것. 붉은악마 측은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월드컵 이후에는 표를 우선 배정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다.

붉은악마의 회원이 되려면 붉은 악마 인터넷 홈페이지(reddevil.or.kr)에 들어가 회원가입만 하면 된다. 가입비는 없다. 작년 6월까지만 하더라도 가입시 5000원을 내고 회원카드를 발급받았다. 당시 회원이 약 1만명. 현재 회원은 월드컵 붐에 힘입어 약 12만명으로 불어났지만 핵심회원은 여전히 1만명 정도다.

회원은 10, 20대가 대부분이지만 조직을 이끌어가는 것은 주로 30대다. 초대 회장을 지낸 신인철씨(34)가 월드컵을 앞 둔 3월 4대 회장으로 복귀했다. 부회장은 포항공대 출신으로 현재 스포츠관련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 서동렬씨(33)가 맡고있다.

붉은악마는 회장단이 있는 사무국과 수도권 중부 영남 호남 등 4개 지부(지부 산하에 38개 지회), 강원 제주 등 2개 특수지회, 프로축구팀 서포터클럽을 지칭하는 가맹단체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각 지부에는 수많은 소모임이 있다. 수도권지부의 경우 치우천왕, 크레이지 레드, 축구사랑, 서울유나이티드 등 10여개의 소모임이 있다.

이들 지부 소모임과 가맹단체는 붉은악마를 움직이는 혈관같은 조직이다. 단체관람도 주로 지부 소모임, 가맹단체별로 버스를 전세 내어 오고 간다. 경기별로 중앙사무국이 참가 숫자를 확인하고 버스를 몇 대나 대여할지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혈관조직’들이 알아서 오고가는 분권시스템이다. 지부 소모임 등은 붉은악마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의 세포조직이기도 하다. 붉은 악마의 회장과 부회장은 이들 지부장 가맹단체 등이 추천한 200여명의 선거인단 투표로 선출된다.

서울 신문로 축구협회 건물 방 하나를 빌려쓰고 있는 사무국에서는 10여명이 일한다. 회장 부회장을 포함해 직장인은 비상근 무보수가 원칙이며 대학생들의 경우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시간당 1000원씩을 받는다. 직장인과 대학생의 비율은 반반 정도다.

사무국은 홈페이지를 통해 한국팀 경기 일시를 알리고 개인별 또는 단체별로 관람신청을 받는다. 한 경기에 3000석 이상의 관람신청이 접수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어서 평소에는 표 다툼이 없다. 그러나 월드컵 직전 A매치, 월드컵 한국전 입장권 등은 경쟁이 치열해 개인보다는 지부 소모임과 가맹단체의 몫으로 대부분 돌아갔다.

붉은악마는 치어리더식 응원과 앰프음악을 거부하면서 태어났다. 붉은악마에도 ‘현장팀’이라 불리는 응원단이 있지만 이들의 응원은 축구 경기의 흐름을 알고 누구나 쉽게 동감할 수 있는 간단한 구호와 박수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치어리더식 응원과 차이가 있다.

우리 편이 공을 낚아 챘을 때는 선수들에게 생동감을 주기 위해 템포가 빠른 응원을 시작한다. 상대편이 공을 잡았을 때는 약간 느슨하게 간다.사람은 들리는 음악에 심장 박동을 맞추게 돼있어 상대편이 느슨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팀의 경기 리듬과 함께 가면서 상대편의 리듬을 빼앗으려는 응원수법은 약간 주술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현장팀’은 메인 리딩맨(Main Lea-ding Man)이 총지휘를 한다. 앰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응원단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많은 서브 리딩맨들의 도움을 받는다. ‘탐탐이’라고 불리는 북잡이도 현장팀원이다. 탐탐이는 프로축구팀 서포터 중에서 힘과 박자 감각을 갖춘 검증된 사람이 된다.

‘대∼한민국(구호) 짝짝∼짝 짝짝(박수)’이란 구호 박수는 이제 온 국민이 따라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이 구호 박수는 프로축구팀 수원 삼성 서포터들의 응원에서 유래했다. 붉은악마 창립회원인 이은호씨는 “수원 삼성 서포터인 그랑블루 회원들이 1996년경 ‘수∼원 삼성 짝짝∼짝 짝짝’이란 구호를 사용하고 있었다”며 “이듬해인 전국 프로축구팀 서포터들이 모여 붉은악마를 만들면서 ‘부천’처럼 두자로 된 구호는 ‘한국’으로, ‘수원 삼성’처럼 네자로 된 구호는 ‘대한민국’으로 바꾸는 식으로 국가대표팀 박수 구호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짝짝∼짝 짝짝’이란 박수에 대해서는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서포터들의 북 박자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박수를 ‘대∼한민국’이란 구호에 이어붙인 것은 붉은 악마의 창안물이다. 유럽이나 남미쪽에서는 ‘짝짝 짝짝짝 짝짝짝짝’에 이어 클럽이나 국가이름을 외치는 2-3-4 박수 구호가 주를 이루고 있다.

‘오∼필승 코리아 오∼필승 코리아 오∼필승 코리아 오∼ 올레 올레 올레’는 붉은 악마의 대표 응원가. 과거 프로축구팀 부천 SK의 서포터인 헤르메스 회원들이 응원 다니면서 콧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을 붉은악마가 빌려 사용하고 있다.

붉은악마의 일사불란한 응원방식에 대해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과 배치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사실 유럽이나 남미의 대표팀 응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일본의 울트라 닛폰 응원에서도 이런 일사불란한 응원을 찾아 보기는 어렵다.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한국 신세대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획일주의적 경향의 표출”이라고 말했다.

서포터는 본래 응원하고 있는 팀과 같은 유니폼을 입는 게 법이다. 붉은악마의 핵심회원들은 대부분 한국 대표팀의 연붉은 유니폼을 입는다. 이 유니폼은 선수용 9만5000원, 보급형 4만5000원으로 꽤 비싸다. 붉은악마는 작년 7월 기업의 협찬을 받아 ‘Be the Reds’라고 쓰인 선홍색 유니폼을 일반인들을 위해 무료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 악마의 핵심 회원 중 ‘Be the Reds’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기장에 가보면 붉은 옷 대신 하얀 옷을 입고 있는 한국팀 응원단도 눈에 띈다. ‘하얀 천사’라는 이름의 이 응원단은 붉은악마의 ‘악마’라는 표현에 반발해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응원단. 이밖에도 기업이 후원하는 ‘코리아팀파이팅’(KTF 후원)이나 ‘코카콜라응원단’(코카콜라 후원) 등 갖가지 응원단이 월드컵을 앞두고 경쟁적으로 생겨났다.

신동민 붉은악마 미디어팀장은 다른 응원단과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붉은악마는 관중석이 텅 비어 있던 시절부터 각 프로팀 서포터로 또는 국가대표팀 서포터로 골대 뒤를 채웠다. 다른 응원단은 월드컵 때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월드컵이 끝나면 다른 응원단은 사라지고 붉은 악마만 남을 것이다. 거품이 사라진 빈 관중석을 우리가 다시 채울 것이다.”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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