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梅泉 삶 고스란히 밴 「매천야록」

  • 입력 1998년 2월 26일 19시 27분


매천 황현 하면 역시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유려한 문체,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눈과 비판정신 등 매천의 올곧은 정신과 높은 학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걸작. 이 책은 그러나 구한말 조선의 몰락을 생생하게 그려낸 비극의 망국사(亡國史)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매천야록의 시대 범위는 고종이 왕위에 오른 1864년부터 나라를 잃은 1910년까지. 단순한 정치사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관계 사회 문화 등 사람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담아냈다.

이 책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 알고 있는 사실(史實)의 허와 실을 날카롭게 짚어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의병활동 대목. 매천은 ‘의병을 일으킨 동기는 찬양할 만하지만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의장이나 의병들은 몇 되지 않는다. 대부분 일하기 싫어하는 자들이 떼지어 따라다니며 약탈하고 강간을 자행하는, 광도(狂盜)에 다름아니다’고 쓰고 있다. 놀랍고 섬뜩하다. 실제로 ‘지나친 독설과 과장’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를 바라보는 매천의 시각은 예리하고 냉철하다. 고종이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던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권력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한 예다.

매천야록은 정치 중심 역사서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당대의 살아 있는 사회 문화 생활상을 제대로 보여주는데 있어 이보다 나은 책은 없을 것이다. 고종의 밤 생활 등 황실의 이야기에서부터 벼슬을 사고 파는 비용, 서울의 절도 살인사건, 국채보상운동, 충청도 관찰사가 군수들에게 삭발을 권한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의 방대함과 상세함은 가히 신문을 능가할 정도다.

일생의 대부분을 고향 땅에서 두문불출하고 살았다는 매천. 그런데도 어떻게 이토록 싱싱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을까. 고향집에서 신문과 관보 등을 열심히 구독했다는 사실에서 ‘매천야록’ 탄생 배경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은거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눈과 귀를 활짝 열었던 매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는 곧 역사를 걱정하는 그의 정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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