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김상헌]나라의 자존지킨 「大義정치」

  • 입력 1997년 11월 29일 08시 37분


한 사람의 생애에서 전쟁이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은 일생동안 두번이나 전쟁을 겪었다. 그의 나이 23세때부터 7년간이나 계속된 임진왜란과 67세때인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이 두 차례의 전쟁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바꾸어 놓은 세계대전이었다. 병자호란은 특히 김상헌이 대신의 반열에 올라 정국의 주도자로서 치러야했던 전쟁인 만큼 힘겨우면서도 그의 능력이나 개성이 남김없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었다. 1623년 일어난 인조반정은 율곡(栗谷)학파를 모집단으로 하는 서인이 주도하고 동인에서 분파한 퇴계(退溪)학파의 남인이 동의하여 일으킨 정변으로 순정 성리학자들의 정권장악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다. 광해군대의 북인정권이 시세에 따라 향배를 달리하고 관망하는 실리외교를 폈다. 이에 비하여 반정 이후 신정부는 순정 성리학도답게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들어 명에 의리를 지키고 문화능력이 결여된 무법자로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청나라에 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하였다. 그는 반정에 직접 가담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을 하던 산림(山林)으로, 공신세력의 공서파(功西派)와 노선 분립하여 집권당 안의 비판세력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명분사회이던 조선은 명분이 강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으므로 결국 공서파는 도태되고 청서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636년 청은 기존의 「형제의 의리」가 아니라 「군신의 의리」를 강요하며 북방 기마민족답게 속전속결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명나라를 칠 목적으로 배후에서 동서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조선을 우선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10여년 전 정묘호란때부터 지식인 사회의 여론은 약탈을 일삼는 여진족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다는 원칙론인 척화론(斥和論)으로 결집되어 국론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어 그곳으로 피란하였던 대군 비빈 원손이 청에 잡히자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와 대신들 사이에 화친을 주장하는 현실론인 주화론이 비등했다. 결국 국체의 상징인 왕이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내려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였고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젊은 언관들이 속죄양이 되어 청으로 잡혀갔다. 이때 67세의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대신으로 척화론의 중심인물이었다. 더구나 외교업무의 총책인 예조판서를 맡고 있었으므로 업무수행에 대한 자책감까지 겹쳐 그 누구보다도 치욕감이 심했을 것이다. 그는 전후 상소를 통해 청나라와의 대결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임을 지적하였다. 청나라를 적국으로 설정하고 있는 한 적극적으로 전쟁에 대비해야 할 것이고 그 정신력은 와신상담(臥薪嘗膽)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사회에서 국가 대의로 자리잡은 북벌론(北伐論)의 단초가 되었다. 평화적인 국제질서를 무력으로 와해시킨 청나라를 토벌하여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하여 치욕을 씻는다)하겠다는 북벌론은 상처받은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 운동으로 제기되어 조선후기 사회를 재건하는 구심점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그는 은퇴 후에도 「명나라를 칠테니 조선의 군대를 파병하라」는 청의 요구(1639년)에 반대하는 등 반청의 자세를 분명히 했다. 김상헌의 이러한 입장과 역할은 마침내 청나라에 알려지게 되고 1640년 청의 강력한 요구로 선양(瀋陽)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의주에 도착했을 때 적장이 심문하며 여러가지로 위협하고 회유하였지만 조금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선양에 가서도 여전하므로 청나라 관원들도 그의 충절에 감탄하여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하며 조선 선비의 기개에 존경심을 보였다. 김상헌과 삼학사 등 척화대신이 보여준 굳은 절의와 지조는 뒤에 청나라와의 관계 설정에 순기능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1645년 76세로 선양에서 돌아와 좌의정에 제수되고 10여년의 인질생활을 하였던 효종이 1649년 즉위하자 북벌대의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를 그 이념의 상징적 인물로 떠받들어 대로(大老)라는 존칭을 받았다. 척화론의 주도자로 활약하면서 죽음도 불사르는 의지로 국론을 이끌었고 그의 형 김상용(金尙容·1561∼1637)도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이들 형제는 조선후기 국가 사업으로 계속된 애국지사 현창작업을 통해 대표적인 충신 열사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1백년 후에나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고 했다. 전쟁중에 살아남는 것, 먹고 사는 것이 시급한 현실에서 국민의 정신력을 키우고 자존심을 세우려는 김상헌의 이상주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살아 생전에 효종으로부터 그 노선을 인정받고 응분의 예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가치에 동의하는 국민정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상헌은 그야말로 현실론이 설득력을 갖고 있던 전란의 와중에서도 1백년 후를 내다보며 조선사회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의리와 명분이라는 푯대를 높이 세운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였다. 글/정옥자(서울대교수·국사학) ▼ 약력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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