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대기업의 스크린 독점에 반발 조기종영 선언… 민병훈 ‘터치’ 감독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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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차례만 상영한 뒤 예매율 낮다며 상영관 더 줄여”

민병훈 감독은 “내 영화가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정신을 윤택하게 할 때 가장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이 영화를 안 받아준다면 관객과 직거래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극장에 매달리는 개봉은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민병훈 감독은 “내 영화가 누군가의 삶을 바꾸고 정신을 윤택하게 할 때 가장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극장이 영화를 안 받아준다면 관객과 직거래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극장에 매달리는 개봉은 안 할 것”이라고 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민병훈 감독(43)은 자신이 만든 영화 ‘터치’를 지난달 15일, 개봉 일주일 만에 스스로 조기 종영했다. 상영관을 제대로 내주지 않은 대기업 영화관들에 대한 반발의 뜻에서였다. 민 감독은 지난달 8일 ‘터치’가 개봉된 뒤 전국 12개 극장에서 하루 1, 2회 교차 상영되는 것을 확인하고 배급사에 종영을 통보했다. 교차상영이란 다른 영화와 섞어서 띄엄띄엄 상영하는 이른바 ‘퐁당퐁당 상영’을 말한다. 민 감독은 또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에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의 불공정 거래 실태를 신고했다.

감독이 자기 손으로 작품을 내린 일은 이례적이어서 영화계도 충격에 빠졌다. 지난달 30일 청룡영화제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민식은 수상 소감으로 “우리는 주류에서 화려한 잔치를 벌이고 있지만 동료 감독 누구는 쓴 소주를 마시며 비통해하고 있을 거다”라고 말했다.

올해 관객 1000만 명 이상이 든 영화가 ‘도둑들’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두 편이나 나왔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영화의 최고 호황기라는 말도 들리지만 그만큼 그늘도 깊다. 작은 영화들이 상영관을 잡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이 영화계의 목소리다.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민 감독을 만났다.

―영화 종영 이후 어떻게 지냈나.

“6년을 준비한 영화다.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이고’ 편하게 못 잤다. 하지만 내 자식을 죽여 이슈화해야 다른 자식들이 차별받는 시스템이 바뀔 것 같았다.”

―유준상, 김지영 등 배우들도 많이 섭섭했을 것 같다.

“둘 다 흔쾌히 ‘종영합시다’라고 하더라.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지영 씨는 마음이 보석 같은 사람이다. 최고의 배우로 만들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유준상은 동갑내기로 17년 친구 사이다. 드라마 스태프로 일할 때 그도 무명 배우였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반해 친구가 됐다.”

‘터치’는 민 감독의 4번째 장편이다. 무능한 사격 코치로 알코올의존증 치료를 받고 있는 동식(유준상)과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환자들을 무연고자로 속여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돈을 버는 아내 수원(김지영)의 이야기를 담았다.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인정받아 부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받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김지영과 유준상 연기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도 따랐다.

―영진위는 어떤 조치를 내렸나.

“(‘터치’를 상영한) 모든 극장들이 불합리하게 상영했다고 봤다. 영진위가 표준상영계약서에 따라 교차상영 일수의 2배 기간의 추가 상영을 하든지, 아니면 부금률(극장과 투자, 배급사 등이 수익을 나누는 비율)을 10% 상향 조정하라고 권고했다. 권고여서 법적 효력은 없다. 극장이 이 권고안을 따르지 않으면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할 계획이다.”

영진위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09년부터 운영하는 불공정행위 신고센터의 접수 건수는 민 감독의 경우를 포함해 단 3건이다. 감독이나 제작사는 영화계의 ‘슈퍼 갑(甲)’인 극장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차별을 받았나.

“‘터치’는 전국 97개 관에서 개봉했지만 이는 대부분 허수(虛數)다. 실제로 50개 관도 안 된다. 충북의 한 소도시 멀티플렉스(복수의 스크린이 있는 상영관)에서는 7관에서 이른 아침에 한 번, 3관에서 오후에 한 번. 1관에서 심야에 한 번 상영됐다. 명목상으로는 3개 관이지만 실제로는 합쳐서 하루 종일 4번도 상영이 안 되는 거다. 서울 강남에서는 2개 관에서 이른 아침과 늦은 밤 한 번씩 상영했다. 인터넷 예매의 경우 대기업이 투자한 대형 영화는 일주일 전 예매가 가능한데 내 영화는 목요일 개봉임에도 화요일 밤에야 열어 줬다. 그러고는 예매율이 낮다며 주말이 지나고 상영관을 더 줄였다.”

―대기업이 투자한 영화가 극장을 다 차지한다는 지적이 있다.

“CGV의 계열사인 CJ E&M이 투자 기획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지금까지 20만 회 가까이 상영됐다. 한 회에 10명만 들어도 200만 관객이다. 전국 2100개 스크린 중 ‘광해’가 1000개 넘게 차지했었다. 영화의 품질보다 공급과 유통이 모든 걸 좌우한다. 대기업이 제작, 배급, 유통까지 수직계열화로 영화계를 독점하고 있다. 멀티플렉스 10개 상영관에 대기업 영화가 7, 8개를 차지하는 형국이다. 프랑스, 일본, 미국 등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경우는 없다. 멀티플렉스의 원래 취지는 관객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다. 영화는 문화 상품이다. 서점에 갔는데 책 하나로 절반이 채워져 있다면 그건 공포영화다.”

프랑스는 극장에 세제 혜택을 주는 대신 스크린 독점을 규제한다. 멀티플렉스는 한 영화의 프린트(상영 필름 또는 디지털 파일)를 두 벌 이상 보유할 수 없으며, 특정 영화가 전체 스크린의 30%를 초과할 수 없다.

―‘터치’는 지금까지 관객 1만4539명이 들었다. 원래 목표는….

“나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제작비가 5억 원 정도 들었다. 20만 명이 목표였다. 15만 명만 들면 배우, 스태프와 파티를 하려고 했다. 약간 어렵지만 의미 있는 이 영화를 볼 만한 사람이 그 정도라고 봤다. 이창동 감독의 ‘시’가 20만 명이다. 차기작은 23만 명, 다음은 28만 명 이렇게 잡았다. 소박한 꿈이었다. 200만 관객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조금만 상생하자는 것이다. 경제계에서는 대형마트의 영업시간까지 규제하며 작은 가게들을 살리자고 한다. 문화계도 이렇게 하자는 것이다.”

생명에 관한 성찰을 담은 ‘터치’의 여주인공 김지영. 민병훈 필름 제공
생명에 관한 성찰을 담은 ‘터치’의 여주인공 김지영. 민병훈 필름 제공
―영화 제작자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영화 만들기는 어떤가.

“대기업 투자사의 입맛에 안 맞으면 투자받기가 힘들다. 한국 영화가 단순화되는 이유다. 상업영화는 넘쳐 나지만 좋은 영화는 안 나온다. 똑같은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품질에 자신이 없으니 마케팅비를 엄청나게 쓴다. 50억 원 들인 영화면 광고비가 20억 원이다. 그만큼 스태프의 인건비가 줄어든다.”

―대기업이 영화판에 들어오면서 순기능도 있었다.

“극장이 늘고 영화 편수가 늘어 관객이 증가했다. 나도 이런 점은 고무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은 크게 위축됐다. 문화는 다양성이 힘이다. 다양한 사상과 이야기가 존립해야 성장도 가능하다. 규모가 큰 영화, 오락영화만 승리하는 구조로는 얼마 못 간다. 한국 영화 전성기라는데 극장에 가면 볼 거 없다고 한숨쉬는 분이 많다.”

―러시아에서 공부한 이력이 특이하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신학대를 나와 신부가 되고 싶었지만 어쩌다 삼수를 했다. 군 제대 뒤 러시아로 영화를 공부하러 갔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가 신비로웠다. 당시 공산국가가 무섭기도 했지만 예술의 기초가 잘된 나라라고 생각했다. 음악 미술 무용 영화 등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더라. 타르콥스키 감독 밑에서 촬영감독을 지낸 바딤 유소프 교수에게 배웠다. 7년간 예술의 풍요를 마음껏 누렸다.”

―당시는 모두 미국, 유럽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남들과 똑같은 미국, 유럽 유학이 싫었다. 내 데뷔작(‘벌이 날다’)은 타지키스탄에서 찍었다. 세 번째 작품(‘포도나무를 베어라’)은 남들이 어려워하는 종교 영화다. 변방을 떠돌며 도전하는 게 좋다.”

―러시아의 관객과 영화는 어떤가.

“문화적 다양성이 살아 있는 나라다. 러시아 사람도 다 문화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한다. 타르콥스키 영화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지상파에서도 그의 영화를 튼다. 백남준의 미술이 재미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저런 사람도 있네. 뭘 말하는 걸까’라고 의문을 갖고 즐기면 되는 거다. 김기덕 감독은 ‘뭐 저런 영화를 만드느냐’라는 반응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한국 영화 관객은 익숙하지 않은 영화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려워한다. 타르콥스키 영화의 전 세계 누적 관객이 10억 명이다. 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 영화도 100개국에 수출돼 1억 명이 봤다.”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다.

“지금은 1인용 캠코더로 영화를 만드는 시대다. 올해 한국 영화가 400편이 넘는다. 그런데 극장은 한계가 있다. 유통망을 열어 줘야 한다. 마을회관, 기업체 연수원 등 전국 어디에나 영사기가 있다. 이런 시설을 활용하면 독립영화, 작은 영화도 상영할 곳을 찾을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얼마 전에 이런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안다. 문제는 실천이다.”

―앞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 것인가.

“물론이다. 나는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다. 벽을 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게 영화는 삶을 치유하고 새 생명을 얻고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다음 목표는 아예 내리지도 못하는, ‘절대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오전 1시에도 사람이 꽉꽉 차는 영화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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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병훈 감독 프로필

△1969년 서울 출생 △대일외국어고 졸업

△러시아 국립영화대에서 촬영 전공으로 학사, 석사 학위 취득

△작품 및 수상 경력

―‘벌이 날다’(1998년·이탈리아 토리노 영화제 대상, 그리스 테살로니키 영화제 은상)

―‘괜찮아, 울지마’(2001년·체코 카를로비바리 영화 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 비평가상)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년·부산국제영화제 PPP 코닥상)

―‘터치’(2012년)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민병훈 감독#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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