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성백린]발빠른 바이러스는 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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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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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신종 인플루엔자A(H1N1) 감염자가 하루 9000명에 육박하여 사실상 대유행기에 접어들었다. 예측에 따르면 대유행 시 국내 인구의 30%가량(1300만 명)이 신종 플루에 감염될 수 있다. 그러나 신종 플루를 1918년에 크게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과 비교하면 위력은 매우 미미하다. 1918년 스페인 독감의 경우 세계적으로 인류의 반이 감염되어 2% 정도인 5000만 명이 사망했다. 신종 플루의 사망률은 훨씬 낮다. 한국은 0.1% 미만으로 계절형 독감 정도의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보건기구(WHO)가 경종의 수위를 높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멕시코발 신종 플루가 확산되기 전인 연초에 전 세계에 경종을 울린 조류인플루엔자(AI)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H5N1형 조류인플루엔자로 인해 1997년 홍콩을 시작으로 동남아 지역에서 약 4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일단 감염되면 사망률은 60% 이상으로 매우 높다. 그러나 아직 인체 대 인체 감염으로 확산되지는 않았고 10년간 사망자가 400명에 불과하다.

H5N1형 바이러스와 작금의 신종 플루 사이에서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최악의 경우 신종 플루처럼 감염성이 높으며 AI처럼 사망률이 높은 바이러스일 것이다. 독감 바이러스 유전자의 특성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독감 바이러스 유전자는 모두 8개의 조각으로 구성돼 있다. 2개의 다른 독감 바이러스가 한 세포에 동시에 감염되면 감염된 세포 내에서 서로 유전자를 주고받아 변종이 쉽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변종이 동남아 지역에 퍼진 H5N1형 바이러스와 전 세계로 확산되는 H1N1 신종 플루 사이에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이는 또 다른 스페인 독감의 출현을 예고할까.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올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바이러스의 특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무엇보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장하지 못한다. 항상 살아있는 숙주에 기생해야만 생장한다. 바이러스를 무생물과 생물의 중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바이러스로서는 사람을 적절히 살려두어야 사람이 이동하면서 다른 사람을 감염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몸은 아프지만 아픈 몸을 이끌고 지하철을 통해 출근하는 길에 적절히 재채기를 유발하는 등 공기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로 확산을 유도한다. 너도 적당히 살고 나도 살고. 신종 플루는 이처럼 윈윈 작전을 구사하는 좋은 예이다.

감염하자마자 치명타를 날려 사람이 숨진다면? 자기가 감염하는 숙주가 죽어버리므로 바이러스 자신도 더는 활동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감염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너 죽고 나 죽고 식 바이러스로는 사람 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가 에볼라 바이러스이다. 에볼라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국소적으로 발생하는데 감염자의 80% 이상이 숨진다. 다른 사람에게 옮기기 전에 사람이 죽어버리므로 확산이 안 된다. H5N1형 AI가 인체 확산이 안 되는 이유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보면 사망률이 매우 낮은 신종 플루야말로 사람에게 가장 잘 적응한 스마트한 바이러스다. WHO가 경계하는, H5N1과 H1N1 사이에서 사망률과 전파력을 겸비한 변종의 출현을 배제할 수는 없으나 공포에 떨 시나리오는 아니다. 실제로 출현해도 우리가 대처만 잘한다면 바이러스는 시간을 두고 독성이 약한 바이러스로 진화한다. 바이러스 스스로가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성백린 연세대 생명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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