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정재승]과학전문 도서관을 짓자

  • 입력 2005년 3월 11일 18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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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일군의 생명과학자들이 ‘과학지식의 상업화’에 반대하며 ‘과학지식을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결성된 비영리 과학자단체인 ‘과학공공도서관(PLoS·플로스)’은 ‘사이언스’나 ‘네이처’처럼 논문 게재료를 내야 논문을 실어 주고 구독료를 내야 읽을 수 있는 과학저널에는 논문을 제출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전 세계 과학자들에게 보냈다.

전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이기도 한 노벨상 수상자 해럴드 바머스가 창립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패트릭 브라운 교수가 주축이 된 플로스의 편지가 발송되자 과학자들의 반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다. 전 세계 172개국에서 2만8000명이 넘는 과학자가 플로스의 ‘과학지식 상업화 반대 운동’에 공감하며 앞으로 상업화된 저널에는 자신의 논문을 제출하지 않겠다는 데 서명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플로스는 출처만 밝히면 누구라도 출판된 글을 자유롭게 읽거나 인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저널을 만들기로 했고, 고든·베티 무어 재단은 이를 위해 90억 원을 기부금으로 내놓았다. 플로스는 지금까지 ‘플로스 생물학’을 비롯해 5개의 과학저널을 창간해 인터넷상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뛰어난 과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에 이미 저명한 과학저널의 궤도에 올랐다.

미국의 플로스 운동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한국의 과학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의 과학자들이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훌륭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고 날마다 국내 언론에 나오는데, 도대체 우리나라에선 대학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는 일반인들은 어디서 과학저널을 읽고 과학자의 연구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과학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우는 데 과학도서만큼 좋은 것이 없거늘 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수십만 권씩 쏟아져 나오는 과학도서들을 어디서 찾아 읽어 볼 수 있을까. 과학기술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함께 토론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선 과학지식을 자유롭게 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큰 서점의 자연과학코너가 고작이니 앞으로 갈 길이 멀다.

그 대안으로 우리나라에 과학전문 도서관을 짓는 것을 제안해 본다. 공공도서관이나 중고등학교 도서관이 한국의 웬만한 대학 도서관보다 잘돼 있는 미국에서는 굳이 과학전문 도서관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에선 누구나 쉽게 과학저널을 읽고 과학책을 볼 수 있는 공공도서관이 절실하다.

1층에는 어린이를 위한 과학책이 장난감과 함께 펼쳐져 있고, 2층에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과학도서가 가득한 곳. 위층에선 부모가 네이처를 보고, 아래층에선 아이들이 천체물리학의 강연을 들으면서 ‘코스모스’ 같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곳. 이 세상 모든 과학지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어 누구나 컴퓨터 한 대만 들고 들어가면 교양과학도서 하나쯤은 너끈히 쓰고 나올 수 있는 곳. 그런 과학도서관을 꿈꿔 본다.

‘책이 없다면 신도 침묵을 지키고, 정의는 잠자며, 자연과학은 정지되고, 철학과 문학도 말을 잃을 것’이라고 토마스 바트린은 말하지 않았던가. 과학의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어린이들이 부모 손을 붙잡고 들어와, 하루 종일 책과 뒹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도서관. 그곳에서 어린 과학자들을 빨리 만나고 싶다.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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