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세이]박용우/´혈관 나이´ 거꾸로 먹기

  • 입력 2002년 11월 4일 18시 33분


가을의 정취를 채 느끼기도 전 뚝 떨어진 수은주가 올겨울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 중풍이나 심근경색증 발병 위험이 높아 평소 고혈압이나 협심증이 있는 환자들은 겨울을 잘 보낼 수 있도록 주의가 필요하다.

필자는 ‘혈관 나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혈관 나이는 세월의 나이를 따르지 않는다. 나이가 40세지만 혈관 나이는 20세일 수도, 60세일 수도 있다. 나이가 같더라도 혈압이 높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규칙적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의 혈관이 같을 수는 없다. 40세에 돌연사하는 이유는 혈관 나이가 이미 70세를 넘었기 때문이다.

내 혈관 나이는 몇 살일까. 동맥혈관을 내시경으로 들여다보듯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방법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대신 간접적으로 혈관 나이를 예측해볼 수는 있다. 평소 혈압이 높은 사람,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 혈액검사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온 사람, 체중이 과다하거나 배만 불룩 나온 사람,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 평소 신체활동량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혈관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지금 나이보다 10∼40세 더 늙은 상태가 된다. 반대로 규칙적인 운동, 적절한 음주, 채소가 풍부한 식단을 즐기는 사람들은 혈관의 노화가 더뎌질 뿐 아니라 혈관 나이를 거꾸로 먹기도 한다.

몇 년 전 30대 후반의 직장인 남성이 신체검사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다며 진료실을 찾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혈압도 정상이며 비만하지 않아 먼저 3개월 정도 식사요법과 운동으로 조절해 보자며 약처방 없이 돌려보냈는데, 1개월 후 지방 출장 중 돌연사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이 경험은 이후 혈관 노화를 촉진하는 위험인자를 가진 사람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상담과 처방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혈관 노화는 진행과정에서 아무런 증상을 보이지 않는다. 고혈압이나 고콜레스테롤이 두통이나 어지럼증 같은 증상을 보인다면 환자들은 열심히 약을 복용할 텐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 환자들에게 약을 먹으라고 하니 의사도 환자도 힘이 든다. “고혈압을 조절하지 않으면 나중에 중풍이나 심장병에 걸릴 수 있어요.” 의사는 고혈압 때문에 심장병이나 중풍에 걸려 고생하는 환자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렇게 얘기하지만 환자는 ‘담배를 끊지 않으면 폐암에 걸릴 수 있어요’ 정도의 의미로 해석해버린다. 처음에는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복용하지만, 하루 이틀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몸에 별 차이를 느끼지 않게 되고 스스로 약을 조절하다가 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의 혈관이 높은 혈압으로 1분에 70회 이상 공격을 받는다고 상상해 보라. 혈액 내 엄청난 양의 콜레스테롤이 혈관을 돌아다니면서 혈관을 두껍게 하고 탄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면? 담배 속의 니코틴과 독성물질이 혈관 벽에 지속적으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혈관 노화는 당신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장수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혈관이 더 늙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박용우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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