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박명진/'빨리빨리'는 부실만 부른다

  • 입력 1999년 12월 19일 19시 23분


해외에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말 가운데 하나가 ‘빨리빨리’라고 한다. 국민성처럼 인식되어 버린 이 성향은 흔히 게으름과 함께 동전의 양면 관계를 이룬다. 사전에 충분히 연구하고 계획 조정하고, 준비하지 않은 게으름 탓에 일을 집행하는 과정에서는 허둥대며 서두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일들은 시행착오가 심하고 날림에 겉만 번드레한 내실 없는 것이 되기 쉽다. 개인들의 경우와 달리 한 나라의 정책이 이런 과정을 겪게 될 때 그 부작용의 파장은 엄청나게 커진다.

최근 겨우 국회를 통과한 방송법 문제만 해도 그렇다. 지난 정권이 개혁법안을 마련해서는 국회 통과를 못시킨 채 4년간 게으르게 방치했다가 현 정권으로 넘겼다. 현 정권은 기존 법안의 수정 여부를 결정하는 데 만 1년을 소모한 뒤 정작 시간을 투자해야 할 법안 마련은 3개월만에 빨리빨리 해냈고 그것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데는 9개월의 세월을 보냈다. 그 6년 동안 위성은 천문학적 액수의 헛돈을 허공에 뿌리며 헛돌았고 한 세대 젊은이들의 방송사업에 대한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들과 희망은 말라 비틀어져 소실되었다. 실상 수많은 법안이 여야간의 정치싸움으로 회기 중 제대로 심의되지 못하고 막판 시간에 쫓겨 2,3초 동안에 화닥닥 처리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정치적 이기심과 무책임이 빚어내는 게으름과 빨리빨리의 악순환이다.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구들이 벌이는 국내 국제행사나 사업들도 이렇게 치러지는 경우가 많다. 몇년을 두고 준비해야 할 국제적 규모의 행사들을 번개처럼 치르다 보니 시간을 돈으로 사는 셈이어서 남보다 경비를 더 많이 쓰고, 관련자들이 전력투구해도 서두름 속에 내실없는 낭비성의 형식적인 행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나라의 예산제도가 오래 전에 일을 기획하고 준비하기 어렵게 만드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정치적 배려와 계산에서 비롯되는 게으름이 원인이다. 여러 눈치 보고 업무외적인 계산과 저울질에 시간과 정신을 쏟다 보니 정작 때맞춰 연구하고 기획하고 준비하고 찬찬히 꼼꼼하게 살피는 데 소홀해진다. 그런 중에 시간은 흘러 중대한 결정들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집행은 서둘러 몰아치게 되는 일이 많다.

정부의 많은 정책들이 이렇게 입안되고 집행되면서 그 파장은 사회 전반에 미친다. 관련 사업을 수행하는 민간주체들, 조직들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게 되고 결국은 사회 전체가 연쇄적으로 유사한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돌아가게 된다. 한국인들의 게으름과 빨리빨리는 국민성이 아니라 상당 부분이 한국적 조직생활의 결과일 수도 있다.

빨리빨리는 군사정권 하에서 군사전략 식의 효율과 목표달성을 추구해 나가는 방식이 만연되면서 형성된 산물이랄 수 있다. 문민정부 이후 민주화과정에서는 이미 체질화된 속전속결의 군사문화에 정치적 게으름이 합류하게 되었다. 민주화의 필수요건인 각 정파,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 조정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밀실과 막후에서 도모되면서 관련 주체들의 이기심과 무책임이 공중의 감시를 받지 못해 생긴 부작용이다.

결국 게으름과 빨리빨리는 20세기에 우리가 거쳐온 발전 도상, 민주화 도상이라는 역사적 과정의 부정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발전된 민주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것으로 20세기를 마감하는 문턱에서 과감히 날려버려야 할 병폐가 아닐 수 없다.

박명진(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과)

*다음회 필자는 전주 한일장신대 김영민교수(金永敏.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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