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연수/마음의 病이 된 '分斷'

  • 입력 2003년 1월 3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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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1994년은 대단히 무더웠던 해로 남아 있다. 미국 월드컵에 참가했던 한국대표팀은 1승도 챙기지 못했고, 남북정상회담도 무산됐다.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온 나라가 뒤집혔던 그해 봄, 대학도서관에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뒤적이던 나는 황해도 금천(金川)이라는 지명을 발견했다. 내 고향은 경북 김천(金泉)시다. 비슷한 이름의 고장이 북한에도 있다니 신기했다. 언뜻 그런 생각만 들었는데, 금천은 그 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북한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때문이었다.

▼동시대 남과 북의 상반된 인간▼

예컨대 1970년 김천에서 내가 태어날 때, 황해도의 금천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고 치자. 내가 유신체제 속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제5공화국 시절에 10대를 보낸 것처럼 그 아이 역시 나름대로 이런 저런 굴곡을 거쳤겠다. 그런데 생김새도 성격도 비슷할 그가 나와는 완전히 상반된 인간형으로 자랐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약간 섬뜩했다. 내가 금천에서 태어났다면 사회주의적인 인간형이 됐을 것이라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겨우 몇 백 ㎞만 위치를 옮겨도 정체성이 완전히 달라진다면 ‘나’란 도대체 무엇일까? 왜 내 정체성이 그토록 우연하게 결정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금천이라는 지명 때문에 촉발된 이 의문 덕분에 나는 일제강점기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다. 모르긴 해도 태어나는 위치에 따라 아이의 정체성이 우연히 결정되는 나라를 꿈꾸며 무장투쟁을 벌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정파마다 추구하는 바는 달랐겠지만, 이렇게 반으로 나눠진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생각으로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않았겠지.

1994년 내가 만주지역 무장투쟁 집단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동족상잔이 벌어져 나라가 반으로 나뉜 데는 이들이 저마다 꿈꿨던 나라의 모습이 달랐던 데에도 원인이 있다. 나는 그들이 건국하려던 나라의 모습이 궁금했다. 분단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준다는 사실도 모르고 고난을 겪으며 무장투쟁을 벌이던 젊은이들의, 이뤄지지 못한 꿈이 내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썼지만, 다 지워버렸다. 문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부끄러운 동족상잔이 아니었다.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좌절과 우연히 결정된 내 정체성을 한눈에 조망하려면 두 개의 정체성을 모두 지녀야만 했다. 그런데 두 개의 정체성, 그건 정신분열을 뜻한다. 소설보다 이 정신분열의 상태를 극복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제야 나는 6·25전쟁으로 야기된 정전체제가 정치적, 역사적 문제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비유컨대 어린 시절, 학대로 입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려면 학대한 사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그 사람에게 똑똑하게 말하고 이제 더 이상 그 사람이 자신을 괴롭힐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야만 한다. 모두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콤플렉스를 이겨야 한다.

집단적 정신분열에 걸린 우리에게 필요한 게 바로 이런 일이다. 막 독립한 우리는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응당 힘있는 나라들이 자립할 때까지 잘 지켜줘야만 했을 것인데, 되레 나라를 반으로 나눠 버렸다. 6·25전쟁과 정전체제가, 그리고 분열된 정체성이 동족상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일 텐데 우리는 그간 이런 분노 한번 제대로 못 터뜨릴 정도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처 직시해야 치유도 가능▼

2002년을 휩쓸었던 ‘붉은악마’니 ‘촛불시위’니 하는 것들이 모두 이런 치유과정에서 나왔다고 본다. 성인이 된다는 건 자신의 콤플렉스와 상처를 똑바로 바라보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뜻이다. 다음 세대에는 우리가 물려받지 못한 온전한 정체성을 물려줘야만 한다는 게 2002년의 교훈이다. 여러 곡절과 어려움이 있겠으나 2003년만은 대단히 무더운 해로 기억에 남지 않기를, 또 개인적으로는 10년째 붙들고 있는 소설을 끝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연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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