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강석경/천년 古都 경주를 거닐며

  • 입력 2002년 12월 6일 18시 34분


인부들이 능에 올라가 파르라니 벌초한 것이 얼마 전인 듯 싶은데 벌써 손이 시린 계절이다. 능은 어느새 금빛으로 물들었고, 나무들은 잎을 떨어뜨려 대지를 덮어주고 본질로 서 있다. 생명들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고 휴식하는 대지, 건초 냄새를 날리며 겨울 꿈을 꾸는 황금빛 능, 능 옆의 감나무에 날아와 홍시를 쪼아먹고 포르르 떠나는 새 떼, 이맘때의 경주는 가히 환상적이다.

▼손대지 말고 비워야 할 도시▼

대학 도서관에 갈 일이 있어 차를 타려다 서천을 따라 걷기로 했다. 겨울이 닥치기 전에 천변을 산책하려는 것이다. 지난 봄에 벚나무 가로수가 이어진 김유신묘역과 선도산을 마주보며 꿈길인 듯 내를 따라 걸어간 적이 있다. 그 때 어디선가 수백마리 까마귀 떼가 몰려와 검은 재처럼 하늘을 덮었었지. 유적과 자연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주에 산다는 건 아무래도 축복만 같다. 반월성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남천은 포근하지만, 가도 가도 이어지는 폭 넓은 둑 아래로 고인 듯 흘러가는 서천은 황량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가물어 수량이 적건만 청둥오리들이 떼지어 다니니 풍경에 생기를 더하고, 천변에 하얗게 나부끼는 억새무리가 메마른 가슴을 흔든다.

한쪽에선 무슨 공사를 하는지 포클레인으로 흙을 퍼내고 물을 빼내는데 경주에서 저런 현장을 보면 걱정부터 앞선다. 또 무엇을 만들려고. 올해 개통한 자전거길 다리는 옛날 기차가 다니던 철교 자리에 세운 것이지만 학과 노루 장식의 난간은 다시 보아도 조야하기 짝이 없다. 아무 것도 손대지 않는 것이 고도(古都)를 살리는 길이다.

경주는 짓고 세울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비우고 또 비워야 할 도시가 아닐까. 고도의 환상을 깨뜨리는 고층 아파트는 하나 둘 외곽으로 나가고 전봇대조차 땅 밑으로 묻고 능원의 담도 허물어, 방문객들이 1500년 전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폐허의 황룡사지와 계림 숲을 거닐며 자신의 원형을 발견하고, 달팽이집 같은 일상에서 비켜나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간을 맞도록. 그것이 민족의 고향으로서 경주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닐까.

햇살이 따사하여 추운 줄 모르고 천변을 계속 걸었더니 대학병원 건물과 아파트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작은 야산 금장대도 가까이 보인다. 그 아래로 서천과 북천의 합류지점인 청소(淸沼)의 푸른 물이 일렁이는데, 날아가던 기러기도 반드시 앉았다 간다는 이 경관을 옛사람들은 경주의 절경 중 하나로 꼽았다. 뒷날 예기청소(藝技淸沼)는 초혼을 하다 강에 잠기는 무당 모화를 그린 김동리의 ‘무녀도’로 더욱 유명해졌다. 신라 때부터 전해온다는 전설에서부터 곧잘 사람이 빠져죽었다는 60년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서천 돌쩌귀에 묻어 있는 삶의 애환을 보여준다.

‘감자 서리를 하던 소년들이 주인에게 발각되어 쫓기자 홍수로 불은 강에 뛰어들어 한 명은 익사하고 한 명은 떠내려가다 예기청소 위에서 살아났다.’ 감자 하나로 목숨을 잃는 시대였는데, 강과 함께 삶도 역사도 흘러가고, 우리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서천 돌쩌귀엔 삶의 애환이…▼

그러고 보니 저 금장대에는 청동기 시대의 암각화가 있다. 청동기 시대부터 인간이 오갔으련만 예기청소는 오늘도 무심하게 일렁이고 수면 위로 햇살만 스름스름 부서진다. 길을 재촉하려고 돌아서는데 둑 가에 보라색 국화가 무리로 피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겹겹이 핀 작은 국화인데 아직 날이 따뜻해 시들지 않았다. 초겨울 하늘 아래 보라색이 더욱 선연하다. 미안하지만 두 세 가지 꺾어야겠다. 꽃을 바칠 영혼이 있으니. 꽃가지를 손에 들고 동대(東大)로 향하면서 도서관에 갔다가 학교 뒤편에 있는 석장사지까지 가보리라 생각한다. 신라의 조각가 양지 스님이 머물렀던 사찰이다. 석장사지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니 양지 스님이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성 안의 남녀가 진흙을 나르며 불렀다는 풍요(風謠)가 입가에 맴돈다.

오다 오다 오다 / 오다 서럽더라 / 서럽더라 우리들이여 / 공덕 닦으러 오다.

강석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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