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한진수/검찰과 정치

  • 입력 1999년 11월 10일 19시 58분


정치인들은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말이 적절하고 정확해야 하는데 말하는 데 프로인 정치인들의 말이 부적절하거나 부정확해 설화(舌禍)를 빚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일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설화나 문제를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에서 시비를 가리려는 것도 프로답지 못한 정치 행태인 것 같다.

검찰이나 법원에 걸려 있거나 걸려 있었던 정치인 상호간의 고소 고발사건은 한두건이 아니다.

최근의 ‘언론문건’사건이나 ‘빨치산 수법’ 파문 외에도 ‘공업용 미싱’발언(한나라당 김홍신의원)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에 있다. 지난 대선 때는 이회창후보의 아들 이정연씨가 “소록도에서 밤낚시를 하고 지낸다”고 주장한 당시 국민회의의 대변인이 검찰에 고발됐다.

뿐만 아니라 ‘20억원+α’ 주장(한나라당 강삼재의원), ‘국회 529호실’사건, ‘오익제씨 밀입북’과 관련한 발언으로 여야가 맞고소한 사건 등도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로 가져간 정치적 사건들이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검찰로 가져간 이들 사건이 검찰에서 명쾌하게 진위(眞僞)가 가려진 적도 없다. 검찰에서 명쾌히 진위를 가리기가 어려운 사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의 한 인사는 “정치적인 고소 고발사건은 검찰에 고발하더라도 사건을 경찰로 내려보내 경찰서 조사계에서 조사를 받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푸념했다. 정치적 사건으로 검찰만 만신창이가 된다는 하소연이다.

일본의 경우 정치인들끼리의 고소 고발사건은 거의 없다. ‘소송의 나라’ 미국에서도 정치인들 상호간의 명예훼손 문제를 검찰이나 법원에서 시비를 가리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이들 나라 정치인들은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이나 문제가 될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정치적으로 포용하는 범위가 넓기 때문이리라.

한 미국언론사의 서울주재 한국인 기자는 “본사에서 온 기자가 언론문건사건을 기사화하자고 했으나 내가 말렸다. 미국사람들은 정치인이 정치인을 고소했다면 100% 근거가 있을 것으로 믿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해줬다”고 말했다. 신뢰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상황을 지적하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정치 수준이 이처럼 후진적(後進的) 행태를 보이고 있음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후진적 정치 행태가 검찰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그래서 검찰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김대중대통령은 연초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휘호를 남겼다. ‘검찰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검찰의 칼 같은 사정권(司正權) 행사를 주문하는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정치가 바로 서야 검찰이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에서 수용하거나 타협하거나 해명하거나 사과하거나 해서 끝내야 할 정치적 문제를 검찰에서 시비를 가려달라고 떠넘기는 것은 정치권과 검찰 모두에게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과거의 예(例)에서 보아왔듯 검찰이 명쾌히 시비를 가려줄 수 없는 사안들을 정치인들의 결백을 과시하기 위해 검찰에 고소 고발하는 것은 정치권의 짐을 검찰에 지우는 것과 같다.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하면 검찰이라도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한진수〈편집부국장서리〉hans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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