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박완서/「명예교사」가 돼 보니…

  • 입력 1997년 5월 18일 20시 16분


며칠전 「스승의 날」엔 손자가 다니는 중학교에 명예교사로 초청을 받았다.

할머니 명예교사라니,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 때문에 안하고 싶었지만 손자의 선생님 부탁을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 써먹고 사는 덕분에 소위 높은 사람, 잘난 사람들로부터 초대를 받은 일도 더러 있지만 적당한 핑계로 사양도 하고 간혹 가는 일이 있어도 마지못해 가는 것처럼 시큰둥해 하는 것으로 자존심 있게 군 양 했었는데 이번엔 그게 아니었다.

어찌나 긴장이 되고 잘 하고싶은지 며칠전부터 떨렸고 그 전날 밤엔 잠이 다 제대로 오지 않았다.

▼ 어렵기만 했던 선생님 ▼

내 자식 학교보내 본 지가 오래 돼서 잊고 있던 옛날 생각이 다 났다. 그때는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가정방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좋게 말하면 수수하고, 나쁘게 말하면 칠칠치 못해 손님이 온다고 해도 특별히 나 자신이나 집안을 꾸밀 줄 몰라서 한 번은 나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한테 파출부취급을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다는 날만은 달랐다. 아침부터 바깥마당을 쓸고 또 쓸고 집안을 대청소하고 옷이나 화장도 꾸미지 않은 척 우아하고 점잖게 보이고 싶어 몇번씩 고치고 바꾸고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어려운 분이었다. 그때도 가정방문 오신 선생님한테 촌지를 건네는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고 사실은 그 때문에 가정방문제도가 없어졌지만 선생님이 그저 어렵기만한 보통 엄마들은 그런 짓은 감히 엄두를 못냈다.

명강의까지는 못하더라도 아이들의 주의력이라도 모으고 싶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쉽다면 왜 그렇게 선생님을 어려워했겠는가. 단 한시간의 교사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죽을 쑤긴 했어도 중학교 1학년생은 바라다만 봐도 즐거웠다. 어린이도 아니고 아직 청소년도 아닌 그 또래가 일생중 가장 귀여운 나이다 싶었다.

그러나 교무실에 잠깐 들러보고는 또 마음이 달라졌다. 교무실은 꽃 한송이씩 들고 옛스승을 찾아온 늘씬하고 건강한 젊은이들로 붐비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그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이 어쩌면 그렇게 달라보이는지. 물론 일찍부터 조로(早老)의 증후를 보이기 시작하는 대학생하고도 달라서 정말로 싱싱하고 아름다운 청년들이었다. 그런 청년들의 방문을 받고 대견하고 대견하여 함박꽃처럼 환하게 웃는 선생님들은 더욱 눈부셨다. 교직이 무슨 대단한 비리의 온상처럼 비난과 무시를 당하기 일쑤인 요즈음 세상에도 왜 유능한 분들이 선생노릇을 못 그만두고 의연히 지키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을 만드는 기쁨과 보람을 어찌 돈 벌고 권력을 휘두르는 맛에다 대겠는가. 아이들이 한 가정의 희망이요 보배라면 학교야말로 우리가 기를 쓰고 이 세상의 잡스러움으로부터 지켜줘야 할 최후의 청정한 수원지(水源池)가 아닐까.

▼ 「사람을 만드는」 보람 ▼

내 자식만 특별히 봐주기를 바라고 선생님에게 촌지를 건네는 학부모나, 내 자식의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선생님한테 돈을 안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나, 선생님을 능멸하면서 자기 자식이 져야 할 책임을 대신 지우려는 발상에 있어서는 똑같다. 이 두 부류의 학부모 밖에 없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게 된다. 제발 푼돈으로 선생님을 비굴하게 만들지 말자. 선생님 월급 그렇게 적은 거 아니다. 선생님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심이지 푼돈이 아닌 것처럼 내 자식에게 필요한 것도 자립심과 책임감이지 부모 백이 아니다.

박완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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