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파라오의 후예 한국어로 길을 찾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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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이집트 카이로 인근 기자지역의 피라미드 관광지에 있는 스핑크스 앞에 선 한국어 관광가이드 에즈딘 엘하산 씨. 그는 이날 갑자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피라미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왜 관광지 사진을 찍냐’고 했더니 “피라미드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처음 봤다”고 말했다. 이집트 군부의 개입으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축출된 직후 자유주의 세력과 무슬림형제단 지지 세력의 유혈충돌이 되풀이되면서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카이로=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12일 이집트 카이로 인근 기자지역의 피라미드 관광지에 있는 스핑크스 앞에 선 한국어 관광가이드 에즈딘 엘하산 씨. 그는 이날 갑자기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피라미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가이드가 왜 관광지 사진을 찍냐’고 했더니 “피라미드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처음 봤다”고 말했다. 이집트 군부의 개입으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축출된 직후 자유주의 세력과 무슬림형제단 지지 세력의 유혈충돌이 되풀이되면서 이집트를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카이로=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3년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15세에 시작한 가라데. 승리의 감격은 누려보지도 못했다. 자신이 그렇게 못한다는 생각도 안 들었는데…. 결정적인 원인은 187cm의 장신인 그가 키가 작은 선생님들이 흔히 가르치는 ‘올려치는’ 전략만 배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기 시작한 지 3년 뒤 비로소 큰 키를 활용하는 접근법이 시작됐다.

승승장구. 그는 이집트 국가대표가 됐다. 알제리와 독일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국가대표인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실망감이 몰려온 것. “가라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이집트인 에즈딘 엘하산 씨(46)와 한국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1994년 한국총영사관이 개최한 행사에 다녀온 아버지가 한국 얘기를 한 것이 계기였다. 마치 운명처럼 뭔가 통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어서 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갔다. 그러자 한 관계자가 “내년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면 한국어학당도 생긴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첫 수업시간. 정태익 당시 이집트대사는 수강생 25명에게 “여러분은 중동 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최초의 아랍인이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중동지역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최초의 아랍인이다. 드디어 존경받는 일을 하게 됐다.”

‘언행, 운행, 온행.’ 한국어를 배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은행 하나를 두고도 수강생의 발음은 제각각이었다. 2개월 뒤엔 달랑 4명 남았다. 한국어학당이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아버지에게 한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3개월어치 월급을 모아야 한국의 한 달 생활비라면서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곤 1만3000달러(약 1450만 원)를 쥐여주셨다.

에즈딘 가족과 아시아의 인연은 외무부에 근무하던 아버지가 1974년 베이징(北京)에 파견되면서 시작됐다. 7세 소년 에즈딘은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3년간 중국에 살았다. 그때의 추억 덕분일까? 가족의 삶이 동북아시아 3국과 밀접해졌다. 중국 근무를 마치고 외교부를 떠난 아버지는 아인샴스대 중국어과 교수가 됐다. 동생 알라딘은 일본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1995년 4월. 한국에 도착한 에즈딘은 연세어학당에서 2년간 한국어를 배웠다.

아버지가 주신 돈, KBS 라디오에서 아랍어방송 아르바이트로 받은 60만 원, 한국 정부의 장학금을 다 모아도 생활은 빠듯했다. 게다가 한국어는 여전히 어려웠다. 이집트어 ‘게 셀레’라는 말은 씻는다는 뜻. 영어의 ‘wash’처럼 모든 단어에 쓸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는 목적어에 따라 동사가 바뀐다. 얼굴은 세수하고, 머리는 감고, 이는 닦는다.

반면 일본인 친구의 학습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어느 날 작문 시험의 주제가 ‘비만’이었다. 일본인 친구에게 “비만이 뭐야”라고 묻자 “살찌는 병”이라고 했다. 시험이 끝난 뒤 “그렇게 어려운 단어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친구가 말했다. “일본어도 비만(肥滿·발음은 히만)이야.” 에즈딘은 그때 심경을 의성어로 표현했다. “꽈당!”

귀국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집트에 진출한 삼성 등 한국 기업을 찾아 지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어느 곳도 한국어를 쓰는 이집트인을 원하지 않았다. 한 담당자는 “영어를 주로 쓴다”고 말했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다. 한국어를 잊고 싶지도 않았다. 그 결론이 관광 가이드가 되는 것이었다. 1년 반가량 역사 문화재 등을 공부했다. 면허증을 딴 해가 1998년. 하필이면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외환위기에 빠진 때였다. 한국 관광객이 오지 않았다.

1년쯤 지났을 때 한국 여행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의 한 방송사가 시나이 반도에서 유목민 가족을 5일간 촬영한다며 통역을 부탁했다.

첫날 아침 감독이 책 한 권을 꺼내 인용하며 “유목민은 물이 없어서 낙타 오줌으로 씻는다는 데 그걸 촬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목민은 “우리도 항상 물 갖고 다닌다”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감독도 “꼭 촬영해야 한다”며 맞섰다. 유목민에게 전했더니 “그럼 네(에즈딘)가 해”라고 했다. 감독과 유목민은 하루 종일 싸우기만 했다. 울고 싶었다.

날이 바뀌었다. 감독이 “어제 일은 잊고 새로운 일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감독이 그 책을 다시 꺼냈다. “유목민은 염소 똥으로 약을 만든다는데 그 과정과 먹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 유목민은 자신의 텐트에서 다양한 약초를 보여주며 “염소 똥은 안 먹는다”라고 했다. 감독에게 “오늘도 잘 안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은 “에즈딘, 우리 편이야 아니면 저쪽 편이야”라며 화를 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셋째 날. 유목민이 먼저 나섰다. “에즈딘, 5일은 너무 긴 것 같아. 원하는 것 있으면 오늘 찍고 가면 좋겠어.” 감독도 누그러졌다. 모래로 세수하는 모습을 찍자고 했다. 유목민은 막내아들을 불렀다.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

막내가 모래로 세수하자 주변에 있던 형제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지금이야 추억이지만 당시엔 괴로웠다. 한국인은 아랍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아랍과 한국을 연결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키지 상품으로 해외여행을 가면 현지에서도 한국인 가이드가 따라 다닌다.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여행사 대부분이 이집트인 관광 가이드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손을 놓고 있던 그에게 한국 여행사와 연계된 이집트 여행사가 연락해왔다. “한국인 가이드가 1주일에 1200달러(약 134만 원)를 달라고 하는데, 혹시 400달러만 받고 일할 생각이 있나?”

무조건 ‘예스’였다. 400달러면 2800이집트파운드. 현재 이집트 중산층 수입(약 5000이집트파운드)의 절반을 넘는 액수다.

에즈딘은 이를 ‘기적’이라고 했다. 이집트인이 현지에서 관광 일정을 모두 책임진다는 사실을 한국 여행사가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 이집트 여행사가 이런 내용을 한국 여행사에 알렸지만 우연히 팩스가 고장 났다. 그 사이 관광객들은 이집트에 도착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국 여행사로부터 뒤늦게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다짜고짜 “에즈딘, 손님 바꿔주세요”라고 했다. 관광객에게 전화를 넘겼다. 여행사는 관광객에게 “가이드가 외국인인가요?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전화를 받은 손님이 말했다. “되게 신기해요. 좋은데요.” 여행사 관계자는 다시 에즈딘과 통화했다. “잘하십시오. 이번에 못하면 다시는 그룹 못 받을 겁니다.”

에즈딘이 처음으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받은 날은 1999년 8월 14일. 한국에서 돌아온 지 2년 반 만이었다. “일주일 뒤 손님들을 공항으로 모시고 가는 내내 올림픽 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최초의 이집트인 한국어 관광가이드가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에즈딘을 비롯한 대다수 이집트인은 두 시대의 전환기에 살고 있다.

앞서 군부독재 기간은 ‘체제 전환’이나 ‘변화’를 모르던 시절이었다. 3년 전. 카이로 시내에서 25년 전 가라데를 함께했던 친구를 만났다. 그가 말했다. “머리는 빠지고 배도 나왔어. 우리는 달라졌는데 무바라크는 아직도 집권하고 있어. 너무한 것 아니야?”(호스니 무바라크의 집권 기간·1981년 10월∼2011년 2월)

그랬던 무바라크 대통령도 이젠 물러났다. 2011년 2월 아랍의 봄 혁명을 통해서다. 2년이 넘은 2013년 7월 현재도 혁명은 진행 중이다. 무슬림형제단을 대표하던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은 1년 만에 쫓겨났다.

리더를 쫓아낸 것은 이집트인의 정서로 보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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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 퍼진 대표적인 사회문화적 코드는 ‘파라오 문화’. 권한과 책임이 한 사람에게 집중돼 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면 모든 일이 중지되곤 한다. 그러니 지도자에게 순응하는 기류가 만연해 있다. 그런 점에서 무르시가 쫓겨난 것은 파라오 문화의 변화를 상징한다. 그 뒤에는 새로 등장한 젊은 세대의 변화 의지가 있었다.

에즈딘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집트에 관광을 왔던 한국 여성과 5년간 e메일을 주고받은 뒤 결혼해 한 살배기 아들을 둔 에즈딘은 최근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무슬림인 그는 기독교인 아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꾸란과 성경을 함께 보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유대경전까지 포함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와 얘기할 때에도 꾸란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고 성경 얘기를 뒷받침하면 설득력이 더 커진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에서 상형문자를 읽어 내리는 그는 이집트에선 왕들의 업적을 기리는 문구에 후대 왕에 대한 경고가 같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찬란한 역사를 잊고 다투는 현재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는 지금의 혼란은 서로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게흐이카 할 헤 아메헤. 눈 화장 하려다 장님 만들었다는 이집트 속담입니다. 정치인들이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집트의 미래를 망칠 수 있습니다. 과거에서 배워야 합니다.”

카이로=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파라오#한국어#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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