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국적포기=병역기피’ 인식 심어

  • 입력 2005년 6월 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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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변영욱 기자
왼쪽부터 이지은 위원, 김일수 위원장, 최현희 유의선 위원. 변영욱 기자

《새국적법의 시행을 앞두고 미성년자 아들, 손자의 국적 포기를 신청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실명과 신상명세를 공개하는 것이 인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국적 포기가 ‘병역 기피용’이라는 비난이 일면서 장관급 이상의 일부 전직 공직자와 유명 대학교수 등의 실명이 일부 신문과 인터넷 매체 등에 보도되고, 한 인사는 단체장 자리에서 사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 공간에서 “국적 선택의 자유와 사생활 침해”라는 주장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망각한 행태”라는 비난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가운데 본보 독자인권위원회는 7일 본사 회의실에서 이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병역을 필하지 않으면 국적 포기를 할 수 없도록 국적법 개정을 추진한 국회의원 측은 국적 포기자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실명을 공개하겠다면서 신상 자료를 요구하고 있고 주무 부처인 법무부는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봐야 할까요.

▽김일수 위원장=문제의 명단이 7일 관보에 실려 국적 포기자의 인적사항과 호주 이름이 공표됐습니다. 비록 직업 등 상세한 신상명세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저명인사가 포함됐다면 충분히 추측 가능한 단계에 왔다고 봐야겠지요. 법에 따라 관보에 고시되는 것과 별도로 그 이상의 개인 신상 정보를 내놓으라고 법무부에 요구하는 자세는 다소 ‘오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권 침해의 적색 신호가 켜지는 경계에까지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지은 위원=그 국회의원의 지역구가 만약 국적 포기자가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서울 강남 지역이더라도 국적법 개정을 추진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법안 발의 자체가 여론을 의식한 인기가 목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결국 일부 언론에 실명이 보도됨으로써 많은 국민에게 ‘부유층이나 지도층은 병역기피를 위해 이런 심한 짓까지 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줬습니다. ‘국적 포기=병역 기피’라는 획일적인 인식을 심어준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유의선 위원=국민 정서상 충분히 논란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특수한 안보 상황 등에 비추어볼 때 어느 정도 법률에 의한 합리적 제한은 필요하겠지만 너무 국가지상주의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입대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을 법으로 강요해 가도록 하는 방식이 과연 옳은지, 또한 어떤 실익이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외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실체를 법이 간과하고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이들을 껴안아 주는 자세가 국익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현직 고위 공직자로서 아들이나 손자의 국적을 포기시켜 병역 의무를 회피하겠다는 악의적 의도가 명백하다면 합리적 제한은 필요하겠지요.

▽최현희 위원=무리하게 법으로 강제하기보다는 다른 합리적 제한 방법이 없었는지 아쉽습니다. 국적을 포기할 경우 받게 되는 불이익을 분명히 적시해 선택하게 할 수는 없었을까요. 국적 포기 당사자는 미성년자여서 본인의 의사결정권이 반영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미성년자의 권리 보호 측면에서 볼 때도 문제가 있어 법제도의 미비점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김 위원장=헌법은 개인의 행복 추구권을 최상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기대치를 충족시키자고 이를 포기하도록 강요한다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징표가 아닐까요. 물론 이중 국적을 이용해 단물만 빨아먹고 쓴물은 토해낸다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공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효과를 위해 연좌제 같은 연대책임을 물어 비난하고 매도하는 방식은 위험스럽습니다. 이번 국적법 사태가 느슨해지는 병역의무 의식을 다잡아 사회유지 차원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현실을 증명하는 코드로도 읽힙니다.

―다음으로는 아들이나 손자의 국적을 포기시킨 사회지도층의 신상을 공개하는 보도가 과연 합당한지, 인권 침해의 소지는 없는지 등 보도의 문제를 짚어보기로 하지요.

▽최 위원=‘가진 자들의 의무 회피’로 입력되도록 하는 보도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유학이나 해외 체류가 늘었다는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기득권층의 국적 포기는 곧 병역 기피라는 등식으로 연결시키는 보도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언론 보도가 국민 갈등을 부추기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국적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이중 국적자 가운데 거꾸로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도 짚어봤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이 위원=이 문제와 관련한 사회지도층의 도덕성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통념적 수준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실명을 밝히는 보도를 대하고는 과연 이런 방법뿐이었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정말 몹쓸 사람들이구나” 하는 천편일률적인 생각을 갖게끔 보도됐으니까요. 병역 기피 의혹과 함께 가진 자에 대한 불만이 상승효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없는 사람도 기회가 된다면 병역을 회피하고 싶을 텐데 그네들이야 오죽했겠느냐” 하는 자조 섞인 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유 위원=언론이 국민정서를 지나치게 의식해 합리성이나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줄타기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국민정서상 논란의 소지가 충분하고 국가안보 유지라는 공익 목적을 위해 사회지도층 인사의 실명 보도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어느 정도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선동적 분열적 보도가 우세한 반면 합리적 판단을 유도하는 자세는 미약해 균형감각을 잃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갑론을박은 건강성의 표현으로 이해되겠지만 분석적 판단이나 비판 없이 덩달아 춤추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김 위원장=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명사들이 도덕적으로 모범을 보이지 못해 존경심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안타깝고, 언론 보도에도 이런 사정이 내재됐으리라 이해합니다. 그러나 먼저 법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필요했습니다. 사회적 안정을 추구해야 할 법이 유예기간도 없이 시행되면서 ‘기습적 함정’이라는 인상까지 주었으니까요. 언론이 좀 더 분석적으로 접근해 건강한 목소리를 냈다면 법이 ‘바리새인’적 공세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태는 걸러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정리=김종하 기자 1101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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