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사회]<8>노인 배려한 주거공간

  • 입력 2003년 3월 6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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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를 지으며 건강하게 지내던 한모씨(68). 재작년 초에 암 선고를 받고 1년 정도 투병하던 남편을 돌보다 사별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받아 뇌중풍으로 쓰러졌다. 3개월의 입원치료 끝에 지팡이에 의지한 채 겨우 걸음을 옮기는 수준으로 회복돼 지금은 서울 근교의 아파트에서 장남 가족과 함께 산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골로 돌아가고 싶지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시골에 있는 ‘ㄱ자’형 기와집은 나이 든 한씨에게는 너무 넓다. 대문에서 방까지 걷는 데 힘이 들고 일에서 돌아와 걸터앉아 쉬던 마루는 이제는 도저히 혼자서는 오를 수 없다. 대문 밖의 재래식 화장실 이용도 고역이다.

대구에 사는 정모씨(75)는 최근 20년간 살던 단독주택을 팔았다. 대지 90평, 건평 40평의 이 단독주택은 자녀를 모두 출가시킨 뒤 노부부가 살기에 넉넉하긴 했지만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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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조리해 밥상을 방으로 옮겨 식사해야 하고 집안 청소에 빨래를 하는 것이 힘에 부쳤다. 마당의 낙엽을 쓸고 고장난 보일러를 수리하기도 점점 어려워졌다. 지난해 비가 와서 빗물이 샐 때는 난감하기만 했다.

정씨는 아내(70)와 상의한 뒤 아파트로 이사했다. 단독주택보다 편리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욕조 바닥에 미끄러져 머리를 다칠 뻔했고 허리가 굽은 아내가 이용하기에 싱크대가 너무 높다.

인간은 누구나 노화라는 과정을 겪는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일상 생활이 노화가 진행되면 점점 힘들게 느껴지고 심지어는 타인의 도움 없이는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주택이 건강한 사람, 젊은 사람을 기준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노인에게는 오히려 어려움을 준다. 질병이나 사고로 신체능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한 노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전통 주택은 물론 서양식 단독주택이나 빌라,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노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이 지어져 그들의 생활을 어렵고 심지어 위험하게까지 만든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안부전화를 걸어 “위험하니 나가지 말고 집에 계시라”고 하는 게 보통이지만 문제는 집안에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100%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본의 한 연구기관 조사에 따르면 노인 사고사의 63%가 집안에서 생긴다. 미끄러운 바닥, 문턱 등 위험요소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65세 이상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는 고령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만큼 주택(주거공간)을 ‘노인 친화적인 공간’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활동에 지장을 주는 장애요인을 없애야 한다. 계단 높이와 문턱을 낮추고 미끄러지지 않는 바닥재를 사용하면 운동신경이 둔한 노인의 사고를 막을 수 있다.

또 고령자의 체격과 적응력 쇠퇴를 감안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허리가 굽어 사실상 키가 작아지므로 여러 생활용품의 높이를 낮추고 모든 손잡이를 조작하기 쉽게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울러 고령자의 감각적 또는 생리적 기능을 배려해야 한다. 밝은 조명과 적당한 난방 등으로 감각 능력의 저하를 보완하고 침실과 화장실의 위치를 가깝게 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시 아파트 관리실, 이웃, 소방서에 급히 연락할 수 있는 긴급통보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한다고 노인이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수명이 다 된 전등을 바꾸고 막힌 배수관을 뚫고 벽에 못을 박는 등의 사소한 일조차 노인에겐 버거우므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대가족 제도이던 옛날에는 주택의 물리적인 조건이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지만 노후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노인이 직접 밥을 짓지 않아도 되고 병들어 눕더라도 누군가가 뒷바라지를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를 적게 낳고 ‘노인 부부’ 또는 ‘나홀로 노인’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노후를 가족에게 의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가족의 역할을 국가, 사회, 지방자치단체가 대신 맡아야 한다는 뜻이다.

노인이 편안히 지내도록 주택설계와 구조를 바꾸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주거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건축공학적 방법은 편안한 노후를 위한 최소 요건일 뿐이다. 궁극적으로는 노인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사회복지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이경락 영동대 건축공학 교수

▼일본의 사례…1955년부터 노인주택 건설▼

일본은 1955년부터 주택건설계획법에 따라 노인용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65년 이후에는 민영이 아닌 공영부분에서, 즉 일본주택공단이 노인세대용 주택을 만들고 노인에게 우선 입주권을 줬다.

사회복지 예산에서 노인복지 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13%를 넘은 92년부터는 노인가구에 주택의 증·개축, 보수, 확장에 필요한 생활복지자금을 융자해 주고 있다.

오사카(大阪)의 경우 공사(公社)가 분양하는 주택이나 시가지 재개발 등을 통해 당국의 자금지원을 받는 주택에 대해서는 ‘노인 동거주택 설계 지침’을 따르도록 한다. 이 지침은 활동에 불편을 느끼는 노인을 배려한 것이 특징이다.

우선 아파트나 연립주택 같은 집단주택은 3대가 함께 사는 ‘동거형’ 주택을 원칙적으로 짓도록 했다.

동거형 주택의 노인실은 남향으로 10㎡(3평·다다미 5조) 이상이어야 한다. 독립성을 가지면서 응접실 욕실 세면장 화장실의 동선을 고려해 설치하도록 했다. 노인실은 수납장 냉장고 화장실을 별도로 갖추고 있으며 햇볕을 쬘 수 있는 발코니(폭 1.5m 이상)가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한다.

거실과 연결된 인터폰 벨을 노인실에 만든 이유는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인터폰 벨은 욕실과 화장실에도 설치해야 한다.

또 욕실과 화장실에는 일어설 때 도움을 주는 손잡이를 설치하되 자재는 반투명 아크릴 판을, 바닥은 미끄러지지 않는 자재를 사용토록 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노인이 있는 가정은 이에 맞도록 부분적으로 공간을 개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복도 폭을 일반 주택보다 30㎝ 더 넓히고 세면대를 휠체어 높이에 맞추는 것.

또 목욕탕에 툇마루 형태의 의자를 설치하며 앉아서 편하게 몸을 닦도록 손잡이를 부착하고 욕조 앞에 고정된 나무판자를 놔서 욕조에 쉽게 들어가도록 돕는다.

덴마크의 공영주택은 노인이 고립감을 느끼지 않도록 침실 부엌 거실에서 모두 외부를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부엌 작업대 역시 신체조건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

송상근기자 songmoon@donga.com


①노인이 아플 때 간병인이 어느 쪽에서든 돕도록 침대를 방가운데 설치했다.
②누워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설치했다.
③천장의 전동이동장치는 끈을 잡고 욕실 세면대 거실로 가도록 도와준다.
④천장에는 좋아하는 심리적 안정을 위해 사진이나 그림을 붙일 수 있다.
⑤개조전 싱크대의 높이가 노인들에게는 너무 높았으나 개조 후엔 싱크대는 물론 수도꼭지의 위치가 낮아져 노인들이 부엌일을 쉽게 할 수 있다.
⑥휠체어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든 변기와 노인이 잡고 일어설 수 있도록 벽에 손잡이대를 붙인 욕실. 휠체어가 드나들기 쉽도록 문턱도 없앴다.
⑦휠체어를 탄 노인이 쉽게 이용하도록 거실과 발코니 사이의 문턱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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