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인사이드]지지기반 탄탄했던 DJ도 창당후 총선서 힘겨운 싸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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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당-신당 창당의 정치학

당적을 옮기는 탈당은 정치인에게 ‘최대 승부수’다. 강력한 정치적 제스처이자 의사표현이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1987년 이래 상당수 주요 정치인이 도전과 응전의 선택지에서 탈당 카드를 뽑아들었다. 한결같이 정치 혁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정치적 자충수’로 끝난 경우가 많았다.

13일 안철수 의원이 촉발한 새정치민주연합의 탈당 러시가 20일 김동철 의원의 탈당으로 야권의 ‘심장부’인 광주로까지 번지고 있다. 이는 한국 정치사에서 어떤 의미로 기록될까. ‘탈당의 정치학’이 궁금하다.

○ 선거 앞둔 탈당, 패인(敗因)의 ‘주홍글씨’

민주화 이후 첫 탈당사를 쓴 주요 정치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1985년 2·12 총선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DJ가 손을 잡고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제1야당으로 발돋움했다. 2년 뒤 민주화의 결실로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됐다.

하지만 대선후보 단일화를 두고 YS와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DJ는 대선을 두 달 앞두고 탈당했다. 당시 DJ 진영은 YS와 노태우, 김종필(JP) 후보가 모두 나오면 DJ가 승리한다는 ‘4자 필승론’을 내세웠지만 노 후보가 승리했다. DJ와 YS는 모두 ‘군부정권 연장’ 책임론에 휩싸였다.

현재 신당 창당에 나선 안 의원이 ‘교과서’로 삼는 창당은 1995년 DJ가 만든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일 가능성이 크다. 국민회의는 이듬해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됐고, DJ는 1997년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탈당과 창당의 정치사에서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인 셈이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평가는 엇갈린다. 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79석을 얻었으나 목표 의석(100석)에 한참 못 미쳤다. 민주화 이후 서울에서 패배한 첫 야당이기도 했다. DJ의 대선 승리는 ‘DJP연합’이 주효했다. 더욱이 당시 이인제 후보(현 새누리당 최고위원)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492만 표를 쓸어가지 않았다면 승리하기 힘들었다. DJ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표 차는 고작 39만 표. 아직까지 이 최고위원에게 정권교체 책임론의 ‘주홍글씨’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 세력화에 실패하면 자동 소멸된다

안 의원이 탈당을 선언하자 많은 정치권 인사는 새정치연합 손학규 전 상임고문을 떠올렸다. 안 의원은 탈당선언문에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길을 나서려고 한다”고 했다.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하며 “낡은 정치를 깨고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더 어려운 길을 택하겠다”고 한 손 전 고문과 겹쳐지는 대목이었다.

손 전 고문은 탈당 이후 독자 세력화에 나섰다가 여의치 않자 ‘호랑이굴’인 야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2007년에 이어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패배해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채 지난해 7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3김 시대’ 이후 가장 견고한 지지 세력을 갖고 있다는 박근혜 대통령도 독자 세력화 실패 경험이 있다. 그는 2002년 “1인 지배체제 극복이 정당 개혁”이라며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지만 6개월 만에 한나라당으로 돌아왔다. 박 대통령이 창당에 나섰을 때는 정계 입문 4년 차였다. 현재 안 의원과 정치경험이 비슷한 때였다.

명분보다 실리를 좇거나 정치 재기를 위한 탈당, 자신의 세력에 다른 세력을 합쳐 ‘이종교배’에 성공하지 못한 탈당은 정치사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소멸했다. 안 의원이 넘어야 할 산이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탈당#신당#창당#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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