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Digital]법률 '우등생'이 정치엔 '열등생' 전락

  • 입력 2001년 1월 29일 18시 41분


법의 이념은 정의(正義)다. “정의가 없는 국가는 거대한 강도집단과 같다”고 말한 선현(先賢)도 있다. 그래서 많은 법률가들이 정의실현의 꿈을 안고 정치에 투신하는지 모른다.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의 ‘정치 성적표’는 어떨까. 불행히도 ‘낙제점’에 가깝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 해방 이후 수많은 법학자와 법조 실무가들이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미미했다. ‘법의 지배’를 실현하기보다는 정치논리에 지배당하며 좌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치논리에 지배당해 좌절▼

▽‘성공한 법률가’의 ‘실패한 정치’〓 15일 타계한 백남억(白南檍) 전공화당 의장. 70년대 여당내 ‘4인방’으로 불리며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걸어온 그의 출발점은 ‘법학’이었다. 그는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등에서 형법학을 전공했으며 해방 후 청구대(영남대 전신) 법학교수로 이른바 ‘객관주의 형법학’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60년 참의원으로 정계에 투신,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공화당의 신주류 실세그룹인 ‘4인 체제’의 핵심멤버로 활약한 그는 69년 3선 개헌을 주도함으로써 ‘법의 이념’에서 멀어져 갔다.

71년에는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吳致成)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에 동조하면서 ‘항명파동’에 연루됐고 80년 정치 일선에서 떠났다.

▼“내 머리속에 법은 없다”▼

백 전의장과 규슈제대 동기동창인 엄민영(嚴敏永) 전내무장관은 서울대 법대 교수와 경희대 법대 학장으로 있다가 5·16 직후 최고회의 의장 고문을 맡으면서 정계로 나섰다. 2차례의 내무장관과 주일대사를 역임한 그는 정계에 투신한 뒤 “내 머리 속에는 법 이론이 남아있지 않다. 통행금지 시간을 넘기면 잡혀간다는 것 밖에 모른다”고 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건국 이후 헌법학의 기초를 닦았던 한태연(韓泰淵) 전 유정회 의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와 한양대 교수를 지내다 63년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치권에 들어섰다. 그는 유신헌법을 기초해 후학들에게서 “헌법학계에 역사적 과오를 남겼다”는 말을 듣고 있다.

독일 본대 법학박사 출신인 갈봉근 (葛奉根) 전 중앙대 법대 교수도 유신헌법을 찬양하는 헌법교과서를 저술했으며 그 후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내가 정치를 짝사랑했다”▼

검사출신인 정구영(鄭求瑛)씨는 이들과는 상반된 의미에서 스스로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5·16 후 공화당 의장 등을 지내며 화려한 정치생활을 했지만 69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3선 개헌에 끝까지 반대했고 74년 유신헌법이 “법의 정신을 저버렸다”며 공화당을 탈당했다. 그는 탈당 직후 “내가 정치라는 미사여구에 도취돼 정치를 짝사랑했다”며 자신을 ‘실패한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현정치권에도 법조인 출신이 수십명에 이른다. 이들중 상당수는 국회 법사위에 소속돼 있으며 종종 정의실현보다는 ‘법조 이기주의’를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는다.

▽원인과 과제〓 법률가 출신인사들의 정치행로가 ‘미완성’으로 끝나는 이유에 대해 후배 법조인과 법학자들은 ‘기능적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풍부한 교양과 세상사에 대한 안목이 부족한 상태에서 ‘법률 기술자’로 성장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적당히 이용되다가 용도폐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법률 기술자’ 그쳐 용도폐기▼

또 동국대 법대 한상범(韓相範)교수는 “그들이 배운 법학의 뿌리가 일본 제국주의 법학 자체이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식민지 법학의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 중견 변호사는 “법조출신 정치인들은 선배 법조인들의 실패한 과거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법학도나 법조인으로서 초심(初心)을 잃지 말고 법이 기능적 장식품이 아니라 현실정치발전의 필수품으로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수형기자>sooh@donga.com

▼외국의 경우엔…▼

해외의 유명한 정치인 중에는 법률가들이 많다. 이들은 정치판에서 휘둘리다 사라지는 우리나라 법조계 출신 정치인과는 달리 뚜렷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법에 의한 정치’를 확립해 나간다.

미국의 경우 역대 42명(부시 포함)의 대통령 중 변호사 출신이 25명으로 전체의 60%에 육박한다. 미국에 변호사가 많은 점을 고려해도 그 비율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노예해방을 이끈 링컨은 대표적인 변호사 출신 대통령. 미국 독립선언문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제퍼슨과 닉슨, 포드, 프랭클린 루즈벨트, 먼로 등도 모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거나 변호사를 거쳐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클린턴도 예일대 로스쿨 출신. 그는 아칸소대학 법학과 교수를 역임, 76년에는 아칸소주 법무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여성으로는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인 ‘철(鐵)의 여인’ 마가렛 대처가 있다. 클린턴 전대통령의 부인으로 뉴욕주 상원의원인 힐러리도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으며 미국 100대 변호사에 2차례나 선정된 법조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이끌며 구 소련을 변화시킨 고르바초프 역시 모스크바대 법학과 출신이다.

이밖에 인도의 간디 전 총리,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를 몰아낸 아키노 전대통령, 블레어 영국총리와 미테랑 프랑스 전대통령 등 법조 출신 ‘거장’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해외의 정계에서 성공한 법조인이 많은 이유는 그곳의 법학 및 법조인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구미(歐美)의 법학교육은 먼저 창조적 사고방식과 다양한 삶의 경험이 강조된다.

미국의 경우 학부에서는 법학과가 아예 없다. 문학과 철학 정치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통해 풍부한 교양을 쌓은 뒤 대학원 과정에서 법학교육을 선택한다. 또 ‘법’이 ‘신분상승의 발판’이 아니라 ‘법치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지식과 교양’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한몫 한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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