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성실병’, 무엇이 문제인가?

  • 입력 2008년 10월 15일 17시 40분


우리는 성실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성실은 열정과 짝을 이뤄 우리가 일에 과속하고 집착하도록 유도하는 정신적 소프트웨어 구실을 한다. 직장에서는 ‘적당히’가 없다. ‘적당히’ 했다간 언제 목숨이 간당간당해질지 모른다. 은연중 고강도의 성실을 독려한다. 성실의 절대 기준은 없다. 과거와 현재의 성실이 다르고, 조직마다 성실의 정도가 천차만별이다.

일에 중독된 사원에게 우수사원 표창과 함께 “일밖에 모르는 성실파다”, “승부욕이 있다”는 등의 멋들어진 찬사를 퍼붓는다. 성실 경쟁에 불이 붙으면 고난이도의 신기록 행진이 연일 이어진다. 오랫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실과 열정의 모습으로 우아하게 치장되며 성실의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바야흐로 ‘워커홀릭’이 특급 훈장이 되고, ‘일벌레’와 ‘일개미’가 추앙받는 ‘성실 공화국’이 마침내 탄생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이 땅의 경쟁 구도는 성실 경쟁에 불을 댕긴다. 천연 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고,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는 넘쳐난다. 설상가상으로 근 현대사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전쟁까지 겪는 바람에 세계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다. 전 국민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힘겨운 여건이다.

더욱이 외환위기 이후 평생 고용이 사라지면서 언제든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살벌한 시대가 됐다. 한 눈 팔았다간 막 바로 도태다.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죽기 살기로 일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어서 성실경쟁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성장과 발전 지상주의에 빠진 우리 사회와 기업은 은연중 그것을 조장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가짜 성실에 발목이 잡힌 우리는 날마다 과속과 집착의 유혹을 받는다. 초반 컨디션이 좋으면 파죽지세로 달려든다. 막판 결승 지점에 다다르면 더 불을 뿜는 속성도 있다. 휴일을 앞두고서도 강한 전의를 불태우곤 한다. 집에서 푹 쉴 각오로 배수진을 치고 임하므로 한층 맹렬해질 수밖에. 몸이 탈나고 병나는 반복적인 일상임에도 쉽사리 고치지 않는다.

가짜 성실을 면밀히 분석해 보자. 가짜 성실의 한 축인 과속, 왜 우리는 이토록 심한 빨리빨리의 과속 병에 걸린 것일까? 경제 원리가 지배하는 이 시대는 시간이 곧 돈으로 환산된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속도를 높이는 것은 하나의 정석이다. 스피드는 힘이요, 능력이다. 초고속을 떠받들며 칭송하고 예찬하는 시대다. “더 서두릅시다!”, “더 빨리빨리!” 다그치는 주변의 독촉은 멈추지 않는다. 비디오 빨리 감기 단추를 누른 듯 우리는 허둥지둥 행동한다. 남보다 빨라야 인정받고 살아남을 수 있기에 ‘빨리빨리’는 삶의 행동철학이 됐다.

이번에는 집착이다. 직장인의 일에 대한 집착은 외환위기 이후 한층 심해지고 악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고용 안정이 위협당하면서 직장인은 생존 차원에서 일에 지독하리만치 집착한다. 혹독한 구조조정에 따른 적은 인원에 산더미 같은 업무량은 구조적으로 무리하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혹한 근무환경을 만들어 놓았다. 대휴뿐 아니라 휴가마저 반납한다. 위에서 지시가 떨어지면 야근과 철야근무를 반복한다. 또 우리의 집단주의 문화는 은근히 부추긴다. 혼자 하면 어려워도 여럿이 함께 하면 거침이 없다. 뿐만 아니라 “네가 하는데 나는 왜 못해!”하는 집단 내 평등의식과 “우리 기업의 발전을 위해!”라며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개인의 희생정신은 두려움 없이 몸을 불사르게 한다.

열 받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혈압이 오르고,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며 호흡은 더욱 거칠어진다. 그것도 부족하면 악에 받쳐 독을 품고 덤벼든다. 침이 바싹 마르고 입에서 단내가 난다. 그래도 안 되면 극약 처방을 내린다.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앞 뒤 재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돌진한다. 거의 초인적이다.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아왔건만 왜 이렇게 인생이 꼬이는 거야.”

“성실하게 산 죄밖에 없는데….”

일이 안 풀리면 가끔 주절대는 넋두리다. 남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의 가짜 성실과 반쪽 성실 때문이다. 과속과 집착으로 얼룩진 성실을 참된 성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그것은 짝퉁성실이다. 그리고 직장에서는 성실하되, 직장 밖에서는 불성실하다. 일에서는 성실하되, 인생에서는 불성실하다면 온전치 못한 반쪽 성실에 불과하다. 그것을 갖고서도 원하는 성공, 보장받을 수 있을까? 턱도 없는 소리다.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당신, 당신의 성실은 가짜와 반쪽짜리는 아닌지 묻고 싶다. 또 주변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동료 중에 크고 작은 병에 시달리지 않는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성실은 심신을 파괴하는 위험한 성실에 다름 아니다.

<출처 = 하루테크(최문열 지음, 미디어락 펴냄)>

ⓒ donga.com & ePR news,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