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약 저 약 섞은 처방… 약 주고 병 준다

  • 입력 2007년 9월 15일 03시 01분


코멘트
■심평원‘질병금기’약 처방 실태 보고서

《만성기관지염과 천식을 앓고 있는 Y(49) 씨는 얼마 전 병원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다가 약사가 “이 약은 함께 먹으면 큰일 나는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의사가 모두 8개의 약을 처방했는데 3개는 함께 복용하면 절대 안 되는 약이라는 것이었다. Y 씨가 병원에서 당뇨병 증세를 설명하자 의사가 당뇨병 치료제 ‘다이아벡스정’을 함께 처방한 게 문제였다. 다이아벡스정은 천식 환자가 복용하면 안되는 ‘절대적 금기’ 약물로 분류돼 있다.》

의료기관 90%가 섞어 쓰면 부작용 부르는 처방전 발급

아스피린 잘못 투약 2만 건으로 최다… “검증시스템 필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에게 제출한 ‘의약품 다품목 처방 분석 보고서’를 본보가 단독 입수해 분석한 결과 특정 질병의 환자가 또 다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동시에 복용할 경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질병 금기’ 약물을 병원들이 마구 처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평원은 2005년 한 해 동안 전국 대학병원, 종합병원, 서울 지역 의원 등 2567곳에서 외래환자에게 발부한 처방전 중 동시에 11개 이상의 약을 처방한 20만1193건을 분석했다.

▽의료기관 90.3%가 질병 금기 어겨=이 보고서에 따르면 2567곳의 의료기관 중 90.3%인 2318곳이 1회 이상 질병 금기를 어긴 처방전을 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병원은 42곳 모두가, 종합병원은 248곳 중 247곳이, 동네 의원은 2277곳 중 2029곳이 질병 금기를 어겼다.

건수로 보면 20만1193건의 처방전 중에서 78.1%에 해당하는 15만7208건이 질병 금기를 어기고 발부된 것이다.

질병 금기 약물 처방이 많은 것은 진료 현장에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약물을 처방하는 ‘다품목 처방’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심평원의 ‘내과 분야 원외처방의 품목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하반기 내과 분야에서 이뤄진 외래처방 가운데 한 번에 6개 이상의 약품이 처방된 비율은 23.2%에 달했다.

일부 대학병원의 경우 외래환자의 10%에게 10개 이상의 약물을 동시에 복용하도록 처방했다.

▽아스피린은 만병통치약?=보고서에서 분석 대상이 된 질병의 종류는 4353개, 약품의 품목 수는 5290개였다.

질병 금기 위반이 가장 많은 약은 아스피린. 아스피린은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등 35종의 질병에서 부작용이 우려돼 함께 복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질병 금기를 어기고 아스피린을 처방한 사례가 1만9464건이나 됐다.

두 번째는 당뇨병 치료제 ’메트포민’으로 이 약은 신부전증, 폐기종 등 함께 쓰면 안 되는 질병이 204종이나 된다. 그러나 이를 어긴 처방이 1만6830건에 달했다.

세 번째로 질병 금기가 많은 약은 독감, 골수염, 신장염 등 150종의 질병과 금기 관계에 있는 당뇨병 치료제 ‘글리메피라이드’로 7905건이 처방됐다. 고지혈증 치료제 ‘심바스타틴’은 만성간염, 간질환 등 192개 질병과 함께 쓰면 안 되지만 처방 건수가 7594건에 달했다.

울혈성 심부전 환자에게 처방하면 안 되는 혈전용해제 ‘실로스타졸’과 협심증 치료제인 ‘딜티아젬’도 질병 금기를 어긴 처방건수가 많았다.

질환별로 보면 심장질환과 위장질환 계통 환자에게 질병 금기를 어긴 처방전이 발급된 사례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금기 약물 자동 분별 시스템 필요=정 의원은 “정부가 2003년에도 질병 금기와 관련된 조사를 하는 등 절대 금기 처방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적극 대처하지 않고 방치해 왔다”고 지적했다.

심평원은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해 의사나 약사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부적절한 약품 사용을 적발하고 교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신현택 숙명여대 의약정보연구소장은 “처방전을 발급하기 전에 환자의 병력과 약력을 검토해 질병 금기 약물들을 자동으로 가려내는 ‘처방검토시스템(DUR)’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