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성희]e 착한 ‘빵집 아가씨’

  • 입력 2004년 11월 7일 18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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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틀면 나쁜 소식만 나오고, 서로 욕하고 헐뜯고…. 하지만 누나를 보면서 아직까지는 한국이 살 만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바르게 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내 주위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될게요.”

요즘 인터넷 검색어 중에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이 ‘빵집 아가씨’이다. 이 아가씨의 블로그에는 아직까지도 감동한 누리꾼(네티즌)의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빵집 아가씨가 유명해진 연유는 이렇다. 서울 강남역 부근 한 제과점에서 일하던 길지빈이란 이름의 이 아가씨는 지난달 가게 앞 인도에서 팔을 전혀 못 쓰고 다리는 절단된 노숙자가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다.

1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길씨는 이 노숙자가 남 같지 않아 제과점 주인인 이모의 허락을 받은 뒤 빵 몇 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날씨가 몹시 추웠던 이날 길씨는 이 노숙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져온 빵을 조금씩 떼어 입에 넣어주었다.

같은 시간 마침 부근을 지나던 동갑내기 여대생이 카메라폰으로 이 장면을 찍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네티즌이 이 사진을 퍼다 나르면서 길씨의 선행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디지털 문화와 휴머니즘이 결합했을 때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준다. 만약 이 여대생에게 카메라폰이 없었으면?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았으면? 누리꾼이 블로그를 방문하지 않았으면? 이 장면은 묻혀 버렸을 것이고 엄청난 사회적 메시지를 지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세상을 그래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힘은 카메라폰과 같은 첨단 장비가 아니라 추운 날씨에 구걸하는 장애인을 안타깝게 여긴 인간애였다.

누리꾼들이 놀라운 힘을 보여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고 김선일씨의 참수 동영상이 나돌지 않은 것도 누리꾼들의 성숙한 태도가 이뤄 낸 것이다.

사실 책이나 신문보다는 컴퓨터, 인터넷, 휴대전화를 달고 사는 이른바 N세대에게 기성세대는 기대보다는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임에 빠진 아이들의 문제를 고민해 보지 않은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 아이만은 음란사이트를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부모가 아직도 있을까.

디지털 세대는 독립심과 자율성, 참여의식이 강하지만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고 정당한 권위나 기존 제도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디지털은 원하든 원치 않든 시대의 거센 흐름이다. 기성세대는 변화의 시대를 주도할 능력과 자세를 디지털 세대에게 길러 줄 책임이 있다. 디지털에 휴머니즘을 결합하고 사회적 책임과 도덕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성세대의 몫이다.

빵집 아가씨로 상징되는 디지털세대는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아직 휴대전화 문자 자판도 못 외우고 ‘싸이질’도 못하지만, 이런 것이 디지털의 힘이라면 독설이 난무하고 편 가르기만 가득한 현실세계를 떠나 디지털의 바다로 기꺼이 빠지고 싶다.

정성희 교육생활팀장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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