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알고있다…'기억 연구' 어디까지 왔나

  • 입력 2003년 11월 25일 17시 1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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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기억하고 있는 사례가 많다. 정서적 충격이나 뇌 일부가 손상된 경우에도 뇌에는 기억이 남아 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모든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우리가 그 기억을 끄집어내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난달 남편을 죽인 범인을 현장에서 목격했으나 당시 충격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던 아내가 며칠 후 최면을 통해 사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범인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소식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최면이 과학인가라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이 얘기는 기억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가톨릭대의대 신경정신과 채정호 교수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사람이 큰 충격을 받아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는 흔하다”며 “이는 심리적 충격 때문에 뇌의 기억을 억누르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목격자 자신은 기억하지 못했지만, 목격자의 뇌는 범행현장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당장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기억상실증 환자의 얘기를 실감나게 다룬 영화 ‘메멘토’의 한 장면. 자신의 몸에 문신을 해 기록을 남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뇌에 기록하는 과정과 이를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을 모두 포함하는 행위다. 고려대 교육학과 김성일 교수(심리학 박사)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정상인의 대부분은 뇌에 기록된 정보를 끄집어내는 데 실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극적인 사례는 새로운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 환자는 몇 분 전에 들었던 이야기도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 자신이 매일 보는 의사도 만날 때마다 새로 악수하며 인사했다. 한번은 의사가 손에 압정을 넣고 이 환자와 악수를 했는데 이 환자는 고통을 느끼며 손을 뺐다. 다음날 의사가 악수를 청하자 이 환자는 거절했고 그 이유를 묻자 왠지 악수하기가 싫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지만 뇌에는 그 정보가 기록돼 있었던 것이다.

기억은 어떻게 뇌에 기록될까. 뇌에서는 신경세포들이 시냅스라는 부위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기억은 뇌의 여러 영역에서 시냅스의 연결 강도를 높여주는 방식으로 저장된다. 강한 기억이란 이 연결 강도가 높은 것이다.

기억에는 현재 사용하는 작업기억(단기기억)과 지식으로 굳어진 장기기억이 있다. 작업기억은 잠시 정보를 유지하고 조작하는 체계다. 필요해서 누군가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경우처럼 작업기억은 대부분 금방 잊어버린다.

반면 인지과정에서 새로운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키면 장기기억으로 저장될 수 있다. 그래서 특정한 것이 기억나지 않을 때 적당한 단서나 자극을 주면 기억나기도 한다. 지난 주말에 친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 친구를 농구장에서 만났다는 정보를 받거나 직접 그 장소에 가본다면 그 말이 기억날 수도 있다. 한 정보가 다른 정보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종종 장기기억이 고립돼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때도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김 교수는 밝혔다.

1959년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에 소개됐던 미국 신경외과의사 와일더 펜필드 박사의 고전적인 실험은 유명하다. 펜필드 박사는 간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환자의 대뇌를 전기적으로 자극했는데, 특정 부위에 자극을 가하자 이 환자는 초등학교 동창생의 이름처럼 오랫동안 기억해내지 못하던 사실을 술술 말했다.

어떤 신경심리학자들은 모든 기억이 ‘영구기억’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모든 기억은 뇌의 어딘가에 기록, 저장되는데 단지 사람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서울대 의대 핵의학과 강은주 교수(심리학 박사)는 “어떤 기억이든 골고루 퍼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며 “하나의 기억이 뇌의 여러 부분에 네트워크로 기록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운동이나 기술과 관련된 기억이다. 뇌의 특정 부위를 다쳐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의 경우 자신이 과거에 골프라는 운동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골프장에 가면 곧잘 골프를 친다. 골프와 같은 운동에 대한 기억이 뇌의 여러 부위에 분산돼 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이충환 동아사이언스기자 cosm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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