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없는 신용사회]<上>10, 20대 휴대전화-카드 과소비

  • 입력 2003년 1월 2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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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A군(19)은 “친구들 가운데 나만 휴대전화가 없어요. 입학선물로 하나 사주세요”라고 부모를 졸라 휴대전화를 장만했다.

처음에는 친구와 통화하는 용도로만 사용해 한 달 요금이 2만∼3만원 정도여서 부모님이 주는 용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미로 모바일게임 무선인터넷 문자채팅 등의 부가서비스를 하나씩 신청했고, 이제는 틈만 나면 휴대전화로 게임하고 친구와 채팅하고, 음악 듣고 영화 보는 것이 하루일과가 돼 버렸다.

“어느 날 요금고지서를 받아보니 사용료가 무려 40만원이나 되더군요.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부모님에게 말했다가는 쫓겨날 것 같고 어디 돈을 마련할 곳도 없어 답답하기만 합니다.”

A군은 작년 5월 은행에 갔다가 직원으로부터 “이 통장은 S금융회사에서 가압류했기 때문을 돈을 찾을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P씨(23·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후 중소기업에 다닐 때 부모가 이혼했다. 어머니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래방을 차렸고 P씨는 신용카드로 2000만원을 대출받아 노래방 차리는 것을 도왔다. ‘내가 이렇게 신용도가 좋구나’하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옷 사고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을 모두 카드로 결제하다보니 어느새 빚이 5000만원으로 불어났다.

일이 꼬이다보니 어머니의 가게도 망하면서 두 모녀는 모두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다니던 회사에 월급압류증이 날아오면서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P씨는 자살까지 시도했었다고 한다. 그녀는 지금 고시원에서 살면서 낮에는 옷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단란주점에서 접대부로 일하고 있다. “신용카드가 막히면서 사채를 썼는데 하루에 15만원씩 갚아야 해요. 직장생활을 해서는 해결이 안 돼 어쩔 수 없이 술집에 나가게 됐어요.”

미래의 꿈나무인 10, 20대가 신용불량자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20대 초반에 별 생각 없이 신용카드를 쓰다가 수천만원씩 빚을 진 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10대 신용불량자는 지난해 5월 말에는 1만3000명까지 급속히 늘어났다가 이제는 7000명 수준으로 줄었으나 10대 신용불량자가 이만큼이나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문제다. 이들은 개인신용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금융계의 전과자’ 낙인이 찍히면 어떤 불이익을 당하는지,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

특이한 것은 휴대전화가 중·고등학생은 물론 초등학생에게까지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무선인터넷이 확산되면서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못하는 신용불량자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

이동통신 회사들은 가입자를 추가로 늘리는 것이 어려워지자 휴대전화로 각종 게임과 음악 영화 등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휴대전화 사용시간을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인 C군은 작년 11월 휴대전화 요금이 120만원이나 됐다. 재미 삼아 부가서비스를 많이 이용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요금을 내지 못해 휴대전화 가입에 동의한 C군의 아버지가 12월 신용불량자로 등록됐다.

대학 2학년인 B씨(21)는 요즘 온라인게임을 하느라 학교수업도 거른 채 툭하면 PC방에서 밤을 샌다. 그는 게임에 필요한 무기와 망토 등 장비를 온라인에서 사고 휴대전화로 결제했다. 그가 연체한 휴대전화 요금은 200만원이 넘는다.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중고등학생의 한 달 평균 요금은 4만∼5만원 수준”이라며 “그러나 일부 학생들은 부가서비스를 많이 이용해 요금이 10만원 가까이 되며 10명 가운데 2명은 요금을 연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대 여성 신용불량자는 20만명을 넘어서 심각한 수준에 접어들었다. 이들은 전형적인 과소비 계층으로 비싼 옷과 핸드백, 유흥비를 감당하지 못해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일부 여성은 과소비에 중독돼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서울 강남 룸살롱에서 일하고 있는 L씨(25). “한 번 명품을 쓰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그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별 수 없이 카드 빚을 져야 하고, 갚으려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처음에는 술집에 다닌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조금 지나니 무감각해지더군요.”

L씨는 아직도 한 달 옷값과 화장품값이 150만원이라고 한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업체 “회원 늘리자” 미성년자 무차별 모집▼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신용위기’에는 신용카드사와 휴대전화업체들의 무분별한 회원 확보경쟁도 한몫을 했다.

외형 확장에 눈이 어두워 경제 능력이 없는 10대 미성년자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였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작년 11월 말 현재 10대 신용불량자는 6981명. 이 가운데 신용카드 연체자가 3581명, 휴대전화요금 연체자가 1543명으로 전체의 73.4%를 차지한다.

휴대전화요금 연체는 이동통신업체들이 2001년 이후 연령대별 전용 서비스를 내세우며 공격적으로 회원 확보 경쟁을 벌이면서 급증했다.

이동통신 3사의 요금체납자 수는 1998년 65만명, 1999년 69만명 정도에서 2001년에는 591만명, 지난해 상반기 703만명으로 급속하게 늘었다.

휴대전화는 두 달만 요금을 안내도 정지 당한다. 그래도 요금을 내지 않으면 4개월의 독촉기간을 거쳐 보증보험사로 명단이 넘어가고 ‘통신 신용불량자’로 전산망에 등록돼 다른 이동통신사에도 가입할 수 없게 된다.

정보통신부는 통신 신용불량자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정보이용료’ 부담이 크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정보통신부 통신이용제도과 양동모 사무관은 “정보이용료는 요금 상한선을 두기 어렵지만 청소년 신용불량자 방지를 위해 여러 대책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신용카드업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길거리 모집이나 미성년자에 대한 카드 발급 등 지나친 경쟁을 벌이다 삼성 LG 외환 등 일부 카드사들이 지난해 영업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잠재 부실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 7월 길거리나 가택방문 모집 행위을 금지시켰다. 미성년자는 법정 대리인(부모 등)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카드를 발급해줄 수 있도록 관련법을 바꾸었다. 하지만 일부 카드사는 아직도 미성년자에게 카드를 발급해주고 있다.

여기에 카드사들의 과잉 현금서비스는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주범이다. 카드사들의 ‘신용판매’와 ‘현금서비스’ 비중은 현재 35 대 65 정도. 정부는 올해 말까지 이 비율을 50 대 50으로 맞추도록 했으나 뒤늦은 대책이라는 지적이 많다.

금융감독위원회 이두형(李斗珩) 국장은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현금을 빌려주는 관행을 줄이는 것에서부터 카드 문제를 풀어야 한다”면서 “회원의 소득과 재산 등 결제능력에 따라 현금서비스 이용한도가 결정되도록 강력한 행정지도를 펼치겠다”고 말했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전문가 기고▼

“신용카드가 뭔지 모르고 마구 쓰다보니 빚이 커져서 현금서비스로 돌려 막다가 사채까지 빌려 쓰다보니 어느새 빚이 7000만∼8000만원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살려주세요.”

요즈음 신용회복지원회 인터넷 상담실에는 이처럼 절박한 사정을 호소하며 구원을 요청하는 민원이 폭주하고 있다.

작년 12월 말 전국은행연합회에 등록된 20대 신용불량자는 무려 48만8000명.

30, 40대와 달리 20대는 주로 신용카드로 유료 온라인게임, 고가 유명브랜드 의류와 휴대전화 구입, 음주 등에 사용하고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과소비형’이 대부분이다. ‘양날의 칼’과 같은 신용카드의 특성을 모르고 마구 휘두르다가 중상을 입은 것이다.

물론 신용불량자가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본인의 책임이다. 그러나 ‘칼’의 위험성을 잘 모르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에게 신용카드를 남발하고 사용실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소득규모와 상환능력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사용한도를 늘려줘 이들이 과소비의 유혹에 빠지게 한 신용카드사도 책임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이들에게 ‘칼’의 사용법(자기신용관리법)에 대해 변변한 교육 한번 시키지 않아 이들을 ‘경제적인 어른’으로 키우지 못한 부모와 사회의 책임도 작지 않다.

신용불량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금융경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와 신용관리에 대한 철저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 스스로 자신의 소득을 감안해 합리적으로 지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부모는 그동안 자녀교육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자녀의 용돈관리에는 무관심했다. 학교에서도 영어 수학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경제교육은 소홀히 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경제가 빠르게 성장해 ‘소비사회’로 변모했는데도 과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저축만이 미덕이라고 배운 기성세대들이 ‘합리적인 소비교육의 중요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자녀들은 어느새 무절제한 과소비에 빠져들었다.

이제 우리의 자녀들이 신용관리 실패자가 되어 어두운 그늘에서 살지 않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

자녀들에게 용돈관리와 합리적인 지출습관을 기르도록 지도하고 어려서부터 금융경제와 신용관리교육을 체계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정규 교과과정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경제대국인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투자관리교육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마당인데 우리가 머뭇거릴 여유가 있는가?

한복환 신용회복지원위원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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