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나노기술로 '꿈의 반도체' 도전"

  • 입력 2001년 10월 22일 18시 52분


“반도체의 미래는 나노기술에 달려 있습니다.”

‘알프스의 도시’ 스위스 취리히의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면 아름다운 초목과 호수, 주택에 둘러쌓인 IBM연구소가 나온다.

취리히뿐만 아니라 세계 8곳에 걸쳐 있어 ‘해가 지지 않는 연구소’로 불리는 IBM연구소에서 만난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나노기술’을 강조했다. 스위스 국민들이 험난한 자연환경을 용기와 지혜로 이겨낸 것처럼, 반도체 산업의 한계를 나노 기술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코드판 잘 아시죠? 나노 세계의 레코드판을 이용해 기존 하드디스크를 훨씬 뛰어넘는 저장장치를 만들 수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자신의 부하’라며 농담을 건넨 피터 베티거 박사는 밀리페드(millipede)라는 새로운 컴퓨터 저장장치를 이렇게 소개했다.

기존 하드디스크는 저장용량이 ‘평방인치당 100기가비트’가 한계지만, 새 장치는 1000기가비트급 이상도 쉽게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이곳에서 만든 시제품은 400기가비트급 수준으로 내년말에 상용 제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 기술은 예전에 즐겨 듣던 레코드판과 원리가 비슷하다. 긴 막대 끝에 나노 바늘을 붙인 뒤 이 바늘로 재료판 위에 구멍을 낸다. 이 구멍이 바로 정보다. 구멍이 있으면 ‘1’, 없으면 ‘0’인 셈이다. 전축이 레코드판에 새겨진 홈을 읽어 소리를 내듯 바늘을 다시 구멍에 맞춰 정보를 읽고, 가열해 구멍을 녹이면 정보가 지워진다. 베티거 박사는 “현재 300나노미터(㎚) 지름의 바늘을 수십 ㎚로 줄이면 저장용량이 엄청난 하드디스크가 탄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지식사회의 바탕을 마련한 것처럼 이곳의 과학자들은 나노 활자를 만들어 ‘꿈의 반도체’에 도전하고 있다.

반도체의 성능은 회로의 선폭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달려 있다. 취리히 연구소의 브루노 미첼 박사는 “나노 활자를 이용하면 현재보다 선폭이 200배나 더 좁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며 나노 활자로 찍어낸 전자칩을 보여줬다.

나노 활자는 회로 모양을 활자에 새긴 뒤 금속액을 묻혀 기판에 찍으면 된다. 도장을 찍는 것과 비슷해 지금보다 훨씬 복잡한 회로나 반달처럼 둥근 반도체도 마음껏 만들 수 있다. 신경세포나 단백질을 묻혀 찍으면 바이오칩이 만들어진다. 다만 워낙 작은 활자여서 부러지거나 휘기 쉽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고민이다.

이밖에도 취리히 연구소에서는 코카와 펩시콜라의 맛을 감별하는 전자혀,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반도체 등 다양한 나노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IBM은 매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출원한 기업으로 꼽힌다. 그 산실이 바로 8개의 연구소다. 취리히 연구소에도 세계 각국에서 온 300여명의 과학자들이 일하고 있으며, 86년과 87년 연거푸 노벨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곳에서 유일한 한국인 여성 과학자인 서진원 박사에게 그 비결을 물어봤다.

“연구소는 연구원들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합니다. 이것이 과학자들의 창의성을 높여줍니다. 또 옆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같이 일하는 등 우리 동료가 세계 최고이고, 우리가 하는 연구가 세계 일류라는 생각이 연구에 힘을 실어줍니다.”

<김상연동아사이언스기자>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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