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칼럼]반전운동은 지금부터다

  • 입력 2003년 4월 14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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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바그다드가 미군에 함락되던 날, 유엔주재 이라크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은 전쟁이었다. 전쟁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법이다. 게임은 끝났고 미국은 승자가 됐다.” 국가 통치권이 궤멸된 패전국 외교관의 침통한 소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전쟁은 무엇이고 승리는 무엇인가. 어느 전쟁연구가는 인류 역사상 이 지구 어느 구석에서든 전쟁이 벌어지지 않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전쟁과 함께 살아왔고 전쟁이란 단어는 인류가 갖고 있는 가장 오래된 어휘 중 하나다.

▼이라크 폐허 '전쟁해악' 웅변 ▼

“전쟁은 인류를 괴롭히는 지독한 질병”(마르틴 루터)이란 말처럼 전쟁은 그 폐해를 생각할 때 어떻게든 막아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하나를 발견한다. 전쟁이 그렇게 나쁜 것일진대 왜 어릴 적부터 읽고 배워 왔던 위인전의 주인공들 가운데에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거나 주도한 인물들이 그렇게 많은 것인가. 칭기즈칸 알렉산더대왕 한니발 카이사르 나폴레옹 맥아더 김유신 을지문덕 등등 수많은 인물들은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그들의 ‘무용담’이 서점의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지 않는가.

위인전 속의 전쟁이란 말에는 생존과 애국과 승리라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승자 위주로 기록된 전쟁의 역사는 패자의 고통에 지면을 할애하는 데 인색하다는 속성이 있다. 애타게 반전을 외치던 사람들의 눈에는 이번 전쟁을 미국이라는 사자가 마침내 먹이 사냥에 성공했고 다른 강대국인 하이에나들이 그 주변을 맴돌며 이권에 침 흘리는 모습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라크가 전쟁 이후 경제발전을 이루고 국민이 더 행복해진다면 역사는 도대체 어느 쪽 주장을 더 진한 글씨로 기록할 것인가.

특히 이번 전쟁의 경우 독재에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고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거셌던 정당성 비판은 승전국의 목소리에 덮여지고 미국은 ‘이라크 침공이 정당했다’고 새겨진 메달을 전리품으로 받게 될지도 모른다. 전체 유권자의 100% 투표에 100% 찬성으로 선출된 ‘사담’에게 열광하고 성조기를 불태우며 거리를 메웠던 이라크 국민이 오늘날 후세인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신발로 때리며 어제의 ‘지도자’에게 한껏 화풀이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벌써 그럴 가능성을 읽는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면서도 이번에는 반전에 앞장섰던 프랑스 독일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연합군의 승리로 종전이 가까워지자 전쟁 과정의 비극에는 눈을 감은 채 재빨리 미국과 ‘우방’임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쟁에 익숙한 강대국들에는 “과부와 의족(義足)과 빚 이외에 국민이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던 토머스 모어의 말이 어느 이상주의자의 한탄 정도로만 여겨지는 모양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승전국 논리에 동의하든 안 하든 세계사는 강자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쟁은 국가간 갈등을 해소하는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는데 지구상의 전쟁들이 전쟁 회피를 위한 모든 노력 이후에 발생했는지도 의문이다. 정당성 논란과 관계없이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전염’되어 오는 폐허 속 바그다드 어린이들의 슬픔은 다시 한번 전쟁의 해악을 말해준다.

▼전쟁원인 없애는 운동부터 ▼

바야흐로 이라크전쟁이 끝나가면서 서치라이트처럼 부릅뜬 미국의 눈이 다음은 어디로 향할지 긴장된다. 우리가 숨을 죽이고 지켜봐야 할 이유는 한반도가 다음 관심지역이 될 가능성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반전 운동가들은 시선을 안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한반도에 전운이 드리워지고 있는 것은 북한이 핵개발이라는 원인제공을 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다. 따라서 반전 운동가들은 북쪽의 ‘위대한 인민의 수령’이 이라크의 ‘태양 같은 존재’를 교훈 삼아 핵개발 야욕을 포기하도록 전쟁의 원인 제거를 위한 ‘투쟁’에 고삐를 당겨야 한다. 그때 국민은 시위로 길이 막히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균형감 있는 반전주의자들을 진정으로 지지할 것이다. 그런 날을 기대한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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