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패러다임이 바뀐다]<9>세계 최대 게임 개발업체 EA

  • 입력 2003년 3월 30일 1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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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반지의 제왕’. 게임 내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소품 배경을 영화 현장 및 실제 소품과 똑같이 제작해 게임을 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사진제공 EA
게임 ‘반지의 제왕’. 게임 내에 등장하는 캐릭터와 소품 배경을 영화 현장 및 실제 소품과 똑같이 제작해 게임을 하다 보면 영화를 보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사진제공 EA
《바지에서 허리띠를 풀어 바구니에 담아 X레이 투시기에 통과시키고, 조사관이 양말까지 까뒤집으며 온 몸을 샅샅이 검색한 뒤에야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입국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렇게 찾아간 세계 최대의 게임 개발업체 EA(Electronic Arts).

샌프란시스코 남쪽 레드우드 시에 있는 EA 본사는 건물 4개 동과 넓은 주차장, 잔디밭과 어우러져 대학 캠퍼스처럼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안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진행 중이었다.》

▽10분의 1초까지 아껴라=게임 개발자들이 근무하는 서관 2층 현관에 들어서자 대형 전자시계 4개가 눈에 들어왔다. 숫자는 일, 시, 분, 초, 10분의1초 단위까지 표시하고 있었고 각각의 시계 밑에는 현재 개발중인 게임의 코드명이 쓰여 있었다.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시판 ‘D데이까지 남은 기간’을 알리는 장치였다. 10분의 1초까지 나타내다 보니 숫자가 미처 제 값을 표시하기도 전에 다음 값으로 넘어가려고 몸부림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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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는 1982년 미국에서 136번째의 컴퓨터 게임 개발업체로 시작했다. 당시 회사 이름은 ‘어매이진(Amazin)’이었으나 수개월 뒤 이름을 EA로 바꾸었다. 이후 20년간 EA는 수직 성장, 앞에 있던 135개의 선발업체를 모두 물리치고 한국과 프랑스 일본을 제외한 세계 모든 국가에서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군림하고 있다.

EA는 작년 매출액 17억2500만달러(약 2조1500억원), 순이익 1000억달러(약 1260억원)를 기록했으며 그 뒤를 코나미(Konami) 스퀘어(Square) 액티비전(Activision) 사 등이 따르고 있다.

직원들에게 프로젝트별로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타이머. 긴박하게 줄어드는 10분의 1초 단위의 숫자가 긴장감을 더한다. 레드우드(미국)=나성엽기자

▽게임 개발업체의 위상=EA가 처음 게임을 만들기 시작할 당시만 해도 게임 개발업체는 어린이용 장난감 제조 업체보다 업계내 위상이 낮았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다.작년 12월 19일 개봉한 블록버스터 영화 ‘반지의 제왕―두 개의 탑’은 국내에서만 개봉 첫 주에 관객이 100만명을 넘어서는 등, 세계적으로 9억달러(약 1조1200억원)를 벌어들였다. 이 영화의 성공 뒤에 EA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영화 제작사인 뉴라인시네마와 감독 피터 잭슨은 2000년 크랭크인과 동시에 한국인 교포 2세 아캐이디아 김 개발이사가 이끄는 EA ‘반지의 제왕’ 팀과 작업을 같이 했다. 잭슨은 게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영화 소품과 컴퓨터그래픽 소스, 가(假)제작 상태의 필름을 뉴질랜드 촬영장을 찾은 김이사에게 아낌없이 넘겨줬다.

EA 홍보이사 제프리 브라운은 “그 전까지 영화를 게임으로 만드는 작업에서 개발업체는 언제나 ‘을’이었다”고 말한다. 제작사는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야 “게임을 만들어라, 개봉일은 6개월 뒤다”라며 대본을 줬다는 것. 게임과 영화가 내는 시너지효과는 제로(0)에 가까웠고, 2001년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 ‘007 제임스 본드’는 게임과 영화 모두 이렇다 할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자 007시리즈 영화제작사 MGM은 2002년판 ‘어나더데이’에서 뒤늦게 “반지의 제왕처럼 007게임을 만들어 달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 게임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최소 18개월이 필요하다. 따라서 영화사가 시나리오 단계부터 지원하지 않으면 12개월 안에 다 찍을 수 있는 영화와 세상에 같이 나오기는 불가능하다.

잭슨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게임 ‘반지의 제왕’은 영화 개봉일에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반지의 제왕’을 본 게이머들은 영화표를 샀고, 영화팬들이 게임타이틀을 구입하는 사이 뉴라인시네마와 EA는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이다.

최고운영책임자(COO) 데이비드 마티니 부사장은 “영화의 관객과 게이머는 많은 부분 일치하기 시작했다”며 “블럭버스터 영화를 게임과 동시에 시장에 내놓는 트렌드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온라인으로, 한국으로=플레이스테이션2 엑스박스 등 비디오게임기용 게임소프트웨어를 주로 만드는 EA는 현재 7개국에 13개 연구소, 2000여명의 게임개발자가 있다. 2005년경 플레이스테이션3와 엑스박스2 등이 시장에 나올 때쯤에는 세계에서 비디오레코더(VCR)보다 콘솔(비디오게임기)이 소모하는 전력량이 더 클 것으로 전망된다. EA도 함께 성장할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아메리카온라인(AOL)을 통해 심즈 포고 등의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하기 시작한 EA는 “미국도 한국처럼 정보기술(IT)인프라가 발달하면 온라인 게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며 온라인 게임 사업부를 신설하는 등 나름대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티니 부사장은 “온라인게임 시장이 이미 잘 형성돼 있고 선발주자가 많은 한국시장에서는 EA가 점유율을 높이기 힘들 것”이라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정서를 이해하는 이 지역 출신의 유능한 게임 개발자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숙제”라고 말했다. 현재 EA코리아에는 직원 30명이 근무중이다.

EA의 지역별 매출 구성
아시아태평양3%
일본4%
유럽30%
북미63%
EA의 게임기별 매출 구성
PC26%
플레이스테이션228%
퍼블리싱16%
플레이스테이션111%
겜보이 5%
엑스박스 5%
온라인게임 4%
게임큐브 3%
기타 2%

레드우드(미국)=나성엽기자 cpu@donga.com

▼EA 래리 프롭스트 사장 ▼

“‘You are only as good as last hit’라는 말이 있습니다.”

EA의 래리 프롭스트 사장은 게임업체인 EA가 승승장구하는 이유로 “히트작을 계속 만들어내는 게임 업체만이 인정받는다”는 단순한 논리를 폈다.

EA의 게임 개발자들은 ‘아메바 조직’처럼 움직인다. 3300명의 전체 직원 중 개발자 2000명은 7개국의 13개 스튜디오에서 각자 프로젝트를 맡아 게임을 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조직적으로 따로 나뉘어 있지 않다. 한 스튜디오에서 다른 게임에 응용할 수 있는 새 기술이 발견되면 이튿날 이 기술은 바로 다른 게임에 적용된다.

최근에는 캐나다 밴쿠버의 스튜디오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시리즈 축구게임을 개발하던 중, 선수가 잔디를 밟았을 때 잔디에 발자국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잔디가 원상 회복되는 효과를 개발했다. 다음날 영국 런던 스튜디오에서 제작중인 해리포터 게임에서 해리포터가 밟은 잔디에도 발자국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개발조직이 우수해도 매번 최고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A의 ‘NFL’ 미식축구 게임은 게임 비평가 사이에서 세가 사의 ‘아메리칸 풋볼’보다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은 NFL이 90%, ‘아메리칸…’은 8%에 그쳤다. ‘FIFA’ 축구 또한 코나미사의 ‘사커’보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으나 시장점유율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EA라는 브랜드 덕분이다. 프롭스트 사장은 “몇 번 히트작을 낸 ‘EA스포츠’의 제품은 소매점에서 소비자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전시해야 할 필수품으로 자리잡았다”며 “강력한 브랜드는 도토리 키재기인 품질의 차이를 덮고도 남는다”고 했설명. 게임개발능력과, 회사에 대한 유통업체의 충성도가 ‘게임 하면 EA’라는 소비자들의 인식과 단단히 맞물려 있어 포스트 정보기술(IT) 시대의 게임분야에서 EA의 입지는 이미 확고하다는 것이다.레드우드(미국)=나성엽기자 cpu@donga.com

▼김수진 개발이사 "반지의 제왕 게임 내손으로 만들어" ▼

반지의 제왕 게임을 만든 아캐이디아 김 개발이사. 그의 등 뒤로 내년 개봉 예정인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편의 스틸 사진들이 걸려 있다. 레드우드(미국)=나성엽기자

세계적으로 4100만개, 한국에서도 8만5000개가 팔린 EA의 게임 ‘반지의 제왕’. 이 게임 제작을 총 지휘한 한국인교포 아캐이디아 김(한국명 김수진·30) 개발이사는 “‘반지의 제왕’은 한국적 가치가 만든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김 이사의 역할은 100여명의 개발자와 관련 인력을 지휘해 영화 개봉일(작년 12월 19일)에 맞춰 게임을 내놓는 일. 말이 프로젝트 책임자이지 그의 역할은 웬만한 회사를 이끄는 일보다 복잡했다.

괴팍하고 개성이 강한, 회사원이라기 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다양한 인종의 게임 개발자 100여명이 일사불란하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퀴벌레 100마리를 줄 세워 소풍 가는 것’ 만큼 힘든 일이라는 것이 그의 비유.

김 이사는 개발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거나 어려움에 마주칠 때마다 ‘제품 우선’ ‘팀 우선’ 원칙을 강조했다.

부모가 미국에 이민 온 이듬해 태어난 김 이사는 줄곧 뉴저지에서 자랐으며 대학에서는 영화를 전공했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하고는 친구와 함께 웹에이전시(홈페이지 제작 대행업체)를 창업했다. 1년여간 회사를 운영하면서 수익이 나기 시작할 즈음, 그는 돌연 하버드대 경영대학원(MBA) 행을 택한다.어렸을 때부터 즐겨온 게임을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그는 대학원에서 게임개발을 공부했고, 논문 작성을 위한 인터뷰를 빙자해 하버드MBA 선배인 EA의 빙 고든 부사장을 만나EA에 들어가게 되었다. ‘반지의 제왕’ 제작과정에서 김 이사는 웹에이전시 운영과정과 하버드에서 익힌 생산 조직 자금관리 등의 경영지식을 총 동원했다.

“프로젝트 시작 초기,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는 상황에서 사업을 설계하는 작업이 가장 재미있다”는 그는 “내 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한국적 가치’가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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