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 노트]직장인을 슬프게 하는 것들

  • 입력 1996년 10월 17일 10시 18분


대기업의 과장으로 있는 친구가 느닷없이 김밥집으로 점심초대를 했다. 친구는 자 신의 직장에도 명예퇴직제가 도입됐다며 여기에 대비해 김밥집을 알아보고 있는 중 이라고 했다. 집안 배경이나 학벌도 별 볼 일 없고 남다른 실력도 없으니 장사밖에 할 게 없는데 특별한 기술이나 자본이 필요없는 김밥장사가 적격이라는 결론을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구는 평생을 시장에서 김밥팔던 할머니들이 수십억원대 재 산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걸 보면 수익성도 좋을 것 같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아닌게아니라 요즘 번화가에는 유난히 김밥집들이 눈에 많이 뜨인다. 김밥집의 유 행은 명예퇴직제와 신문의 미담기사가 빚어낸 사회현상이라는 친구의 주장이 그럴듯 하게 들린다. 경영합리화라는 명분으로 시작된 명예퇴직제가 갈수록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우려 도 높아가고 있다. 내년에도 계속되는 경기하락으로 13만명의 실업자가 새로 생길 것이라는 전망이다. 조기퇴직자들은 대인기피증과 우울증 무력감 등의 증상에 시달 린다. 경험많은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사장시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국가적 손실이 다. 일감을 놓은 「가장」을 지켜봐야 하는 식구들의 「마음고생」은 또 어떤가. 그 러나 이보다 더욱 심각한 명예퇴직제의 부작용이 간과되고 있다. 바로 남아있는 사 람들에게 팽배해 있는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이다. 조직의 군살을 빼 소수 정예만 남기는 것은 단기적으로 경영효율을 높일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생산력저 하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창 일할 나이의 20,30대가 업무는 뒷전이고 유학이나 창 업 전직을 꿈꾸며 제각기 「자기 꿍꿍이속 차리기」에만 열중하고 있다면 문제가 아 닐 수 없다. 기업이 살려면 경영합리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역군들이 『열심히 일 해서 뭘 하나』하는 존재론적 회의에 빠져들게 만들어서도 안된다. 바야흐로 입사시 즌, 여기저기서 채용박람회가 열리고 우수한 인재를 발굴하려는 기업들의 탐색전도 한창이다. 청운의 부푼 꿈을 안고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사회초년생들에게 자신의 장래를 책임져주는 「평생직장」은 없다는 새삼스런 진리를 일깨우는 것은 슬픈 일 이다.<김세원:사회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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