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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2011년)에서 여자 성악 부문 1위를 차지한 서선영 스위스 바젤국립극장 솔리스트(29)는 힘들었지만 많은 점을 배웠던 독일 유학 시절을 잊지 못한다. 2009년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가 뒤셀도르프 슈만 국립음대에서 공부하던 그는 집에서 가까운 슈…
산악인 인생에서 2007년 5월 31일을 잊을 수 없다. 해발 8400m 로체샤르를 등정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6좌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5좌였던 얄룽캉 등반을 마쳤을 때 위성전화로 축하인사를 했을 만큼 각별했던 동료와 후배, 셰르파들을 하나둘 히말라야에서 …
도전하는 사람을 격려하고 이해하는 넉넉함을 갖춰야 한다! 10년 뒤 한국 사회가 한 계단 도약하는 데 꼭 필요한 점이라고 100인은 입을 모았다. 특히 경영인들은 한국 사회가 과거의 활력을 되찾고 좀 더 유연해져야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창조경제가 자리 잡는다고 지적했다. “눈부신 경…
첫 직장은 스물셋의 나를 오래 붙들지 못했다. 의류회사 홍보실에서 카피를 쓰는 일이었다. 8개월이 지나도록 손에 붙지 않았다. 사표는 던졌지만 뾰족한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백수 생활은 1년 가까이 길어졌다. 이때 친구가 권했다. “노래 잘하니 가수 한 번 해봐.” 망설였다. 어릴…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봉준호 “재능 배짱 노력 3박자 갖춘 김연아가 내 경쟁자”](https://dimg.donga.com/a/296/167/95/4/wps/NEWS/IMAGE/2013/05/16/55193954.1.jpg)
이해진 NHN 이사회 의장(46) 사무실로 퀵서비스가 도착했다. 상자 안에는 피터 다이어맨디스의 따끈따끈한 신간 ‘어번던스’ 한 권이 들어있었다. ‘해진아, 이 책 참 좋더라. 같이 읽으면서 우리 이 험난한 세상 어찌 살아갈지 더 고민하자꾸나. 만날 만화책만 보내달라고 하지 말고’라…
대한민국에서 단 100명. 한 번도 지나기 힘든 좁디좁은 바늘구멍을 세 번이나 통과했다. 별 중의 별이다. 올해로 4년째인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통산 세 차례 이름을 올린 ‘명예의 전당’ 대상자 21명 얘기다. ‘도전하는 경제인’ 부문의 경제·경영인이 8명으로 가장 …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1972년 10월 17일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들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통령중심제인 한국에서는 국회를 해산할 수 없다고 배웠는데…. 집에 가서 교과서를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고교 입시를 앞뒀…
유니텔 한게임 NHN 그리고 카카오톡. 한국 정보기술(IT) 시장을 잇따라 평정한 아이콘이다. 모두 내 손을 거쳐 나왔다. 나는 최고의 순간에 도달했을 때마다 방향을 틀며 진화했다고 주변에서 평가한다. 삼성SDS 시절 PC통신의 후발주자인 유니텔을 선두로 끌어올린 뒤 사표를 던졌다. …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오늘의 높은 벽, 10년 뒤엔 열린 문으로”](https://dimg.donga.com/a/296/167/95/2/wps/NEWS/IMAGE/2013/04/02/54131263.1.jpg)
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었다. 1995년과 2002년 각자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첫발을 들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필리핀 새댁’, 말투가 낯선 ‘북한에서 온 여자’로 불렸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생활 18년 차와 11년 차. 이젠 이름만 말해도 알아보는 이가 많다. 다문화 국회의원 …
휠라코리아가 글로벌 휠라를 2007년 인수했다. 한국 법인이 해외 본사를 집어 삼킨 ‘역인수’의 대표적 사례였다. 다른 기업에서 볼 수 없었던 내부경영자 인수(MBO) 방식으로 독립을 추진했다. 나를 비롯한 경영진 6명이 휠라 본사의 휠라코리아 주식을 전량 사들였다. 인수자금이 부족해…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한계는 없다”… 실패도 즐기며 달려온 100개의 꿈](https://dimg.donga.com/a/296/167/95/4/wps/NEWS/IMAGE/2013/05/16/55193879.1.jpg)
안정적인 의사 생활. 하지만 과감히 박차고 나왔다. 아무런 경험 없이 사업에 무작정 뛰어들었다. 시작부터 장애물이 넘쳐났다. 성공보다 더 많은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실패로부터 아무런 배움이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을 뿐이다. 13년이 흐른 지금 그는 어엿한 바이오기업의 …
새터민은 한민족이 통일로 나아가는 데 다리가 되어줄 자산이다. 이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해야 통일 후에도 동질성 회복을 위한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올해 선정된 100인 중에는 오래전부터 탈북자 및 북한 관련 활동에 헌신한 이들이 적지 않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의 조명…
그녀와 나는 자주 ‘세트’로 묶였다. 이상하게 그랬다. 이천 년대가 시작되고 엇비슷한 시기에 등단을 해서인지 어쩐지, 하여간에 세트로 거론된 것이다. 간혹 함께할 자리가 있다 해도 그녀 옆에 앉기가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뭐랄까, 사석에서도 굳이 김혜자 씨의 곁에
1990년대 중반에 국내에서 가장 유행하던 컴퓨터 게임은 테트리스였다. 당시 KAIST 학생 연구실에 가보면 많은 학생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머리를 가까이 대고 뭔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가가 보면 십중팔구 테트리스 게임이었다. 그러나 그때 대학원생 김정주는 여느 학생
이수만은 유난히 눈이 작다. 웃으면 그의 눈은 더욱 작아진다. 그런 그가 무슨 수로 세계시장을 향해 눈을 그렇게나 크게 부릅뜰 수 있었을까. ‘깻잎머리를 한 채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유난히 까만 얼굴의 가수.’ 내가 신문기자로 일하던 시절 ‘가수 이수만’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