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톈안먼사태 24주년, 개혁파 지식인들 지금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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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택연금… 해외도피후 유랑… 여전히 뿌리 뽑힌 삶 이어가
자오쯔양 前비서 사실상 자유 잃어… 前런민일보 기자 귀국 못해 외국 전전
유혈진압 인사들 호의호식과 대조

세계 최대 광장인 총면적 약 44만 m²의 톈안먼(天安門) 광장. 4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상징이자 1989년 6월 민주화 시위의 무대였던 이곳은 개방성은 사라지고 통제의 폐쇄성만 남아 있었다. 경찰들은 X선 투시기로 행인들의 짐을 일일이 검사했으며 광장 남쪽 마오쩌둥(毛澤東)기념당은 아예 문을 걸어 잠근 채 관람객을 받지 않았다. 인근 도로 공사 때문에 2일부터 나흘간 휴관한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24년 전 이날 발발한 톈안먼 사태를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시민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 공식 집계 875명, 시민단체 추정 50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톈안먼 사태가 24주년을 맞았다. 당시 보수파에 의해 뿌리가 뽑힌 젊은 개혁파 지식인들은 아직도 사회의 끝자락에 간신히 삶을 걸치고 있거나 외국을 전전하며 귀국하지 못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공산당 총서기의 정치비서 바오퉁(鮑동·81) 씨는 7년간의 옥살이 뒤에도 지금까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다. 그는 “내 운명에 대해서는 회한이 없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국가에 기여하지 못하는 건 사회의 손실”이라고 말했다.

자오 전 총서기가 직접 챙기던 중국국가경제체제개혁연구소의 천이쯔(陳一咨·73) 전 소장은 당시 경찰 수배를 피해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도피한 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이다. 그는 지난달 출간한 저서 ‘천이쯔의 추억: 1980년대 중국의 개혁’에서 친구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의 장남 덩푸팡(鄧樸方)에게 아버지를 설득해달라고 사정했던 사실을 털어놨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끝내 학생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다. 천 씨는 “모든 개혁 사상가들이 쫓겨났다. 그것은 재앙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림프샘암으로 투병 중이다.

국책 연구기관인 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이었던 장리판(章立凡·63) 씨는 언론 기고 등을 하며 살고 있다. 그는 “당국은 내가 학생들과 개혁파 지도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찾아내려고 했다”며 “사회과학원에서 쫓겨난 뒤 어떤 정부기관에서도 일할 수 없었다”고 전했다.

자오 전 총서기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공산당 기관지 런민(人民)일보의 평론부 주임이던 우궈광(吳國光·56) 씨는 톈안먼 사태가 터지기 전인 1989년 2월 일을 잠시 접고 미국으로 유학 갔다가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현재 캐나다 빅토리아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있다. 국내 복귀를 몇 번 타진했지만 당국으로부터 거절당했다.

반면 당시 유혈 진압에 앞장섰던 강경파 인사들은 부귀영화를 누렸다. 덩샤오핑과 군부 강경파 양상쿤(楊尙昆) 양바이빙(楊白氷) 형제는 천수를 다하고 국가의 최고 예우 속에 유명을 달리했다. 리펑(李鵬) 전 총리는 2003년 퇴임 후에도 인사 문제에 관여하고 있다. 그의 아들 리샤오펑(李小鵬)은 2월 산시(山西) 성 성장에 올랐고, 딸 리샤오린(李小琳)은 중국전력국제유한공사 회장이다.

한편 홍콩의 민주화 및 인권 단체인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는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를 종식하기 위해 투쟁할 것임을 밝혔다고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밍징(明鏡)이 3일 전했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톈안먼사태#개혁파#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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